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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경향신문] 청년시절의 노무현(5/20)
글쓴이 운영진 날짜 2002-05-21 오전 9: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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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일은 언제나 아름답게만 보인다지요?”. 노무현이 1975년 ‘고시계’ 7월호에 쓴 고시합격기 ‘과정도 하나의 직업이었다’의 첫 글귀다. 94년 자서전 ‘여보 나좀 도와줘’를 준비하며 다시 읽고, 눈시울이 붉어졌다는 글이다. 우리 나이로 30세, 늦깎이 ‘출세’한 그는 법대 문턱에도 가보지 않고 만들어낸 성취감과 행복으로 들떴다. 바닥 인생의 쓴맛을 곱씹으며 9년간 오매불망하던 꿈이 이뤄졌기에 그럴 만도 했다.


노무현은 66년 ‘삼해공업’이라는 어망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부산상고 졸업 전부터 교복을 입고 다닌 직장이다. 한달만에 받은 월급은 하숙비도 안되는 2,700원. “그만두겠다”고 하자 사장은 4,000원으로 올려줬다. 끝내 “고시를 해보겠다”고 맘먹고, 한달반치 월급 6,000원으로 헌 법률책 몇권과 기타를 사들고 귀향했다. 그럴 듯한 직장을 기대한 어머니의 실망한 얼굴, 훗날 떠올린 그의 귀향기(歸鄕記)다.


노무현은 실직중이던 작은형 건평씨(60)와 마을 건너 산에 토담집을 지었다. 짚·흙·돌·나무로 방과 부엌을 만든 4평짜리 공부방. 아버지는 ‘마옥당’(磨玉堂)이란 이름을 지어줬다. “최고의 공부방이었죠. 여름엔 허리 깊이까지 땅파고 내려가 시원하게, 겨울엔 이불속에 누워 직접 개발한 독서대로 공부했습니다. 새벽 이장네 음악방송이 짜증나 톱밥넣은 방음벽도 만들었습니다”(건평씨)라는 회고. 읍내에 갔다오다 마을로 쳐들어온 이웃마을 청년 30여명과 맞닥뜨린 노무현이 웃통을 벗으며 “1대 1로 붙자”고 기를 죽여 물리친 것도 이 때다.


노무현은 ‘사시 예비(자격)시험’부터 준비했다. 그러나 책 살 돈이 없자 울산 공사판으로 갔다. ‘함바’에서 가마니를 깔고 자며 받은 일당은 180원. 공치는 날이 많아 밥값도 모자랐다. 그는 발에 큰 못이 찔려 쉬다가 밀린 밥값 2,000원을 놔두고 끝내 고향으로 야반도주했다. 발이 낫자 작은형과 과수원을 만들기로 하고 밤에 김해 농업시험장에 들어가 감나무 묘목 100포기를 훔쳤다. 마침 묘목을 쌌던 신문지에 예비시험 공고가 났다.


그는 예비시험을 치자마자 다시 울산의 겨울 공사판으로 갔다. 야간작업까지 하면 일당 280원을 줬다. 4,000원쯤 모았을 때, 작업중 목재에 얼굴을 맞아 이 3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고시에 합격하고 이를 갈아끼웠지만 지금도 입가에 흉터가 있다. 울산에 동행했던 황일구씨(55·노동)는 “다쳤다기에 가보니 무현이가 피범벅돼 있었다. 집에 연락도 않고 한달정도 입원했다. 어느날 무현이가 신문을 사오라더니, 침대에서 눈이 붓도록 펑펑 울었다. 예비시험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실렸던 날”이라고 기억했다.


23살때인 68년 3월8일 노무현은 입대했다. 군번 ‘51053545’. 그는 원주의 1군사령부 행정병(병력계)을 거쳐, 원통에 있는 을지부대(12사단) GP로 배속됐다. 노무현은 철야 정보상황병으로 근무했고, 대대장 당번병도 맡았다. 지형이 험한 금봉산 철책을 맡는 부대였고, 밤에 무장간첩이 침투하던 때였다. 당시 대대장 노무식씨(예비역 소장)는 “무현은 차분하고 정확하게 상황보고를 잘했고, 까막눈 동료들과도 격의없이 잘 어울렸다. 속으로 아꼈던 사병”으로 기억했다. 노씨는 “시간날 때 책은 많이 봤지만, 고시공부를 했던 먹물티는 안냈다”고 말했다.


노무현은 일병때 몰래 고참을 때려 “첫 휴가때 치료비를 타간”(건평씨) 적도 있다. 친구 정길상씨(목사)는 “못된 상사가 있어 ‘내가 민족 위해 여기왔지, 니 위해 온 게 아니다’라며 패줬다고 했다. 무현이 이마에도 그때 맞은 흉터가 있다”고 전했다. 그는 34개월만에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월남전에 갔다온 동료들이 무더기로 병장을 달아 병장진급 TO가 모자랐던 탓이다.


71년 고향에 온 노무현은 고시에 매달렸다. 두 형이 모두 취직, 집안 형편이 좀 풀렸을 때다. 건평씨는 “고시계를 보며 흐름잡는 데 몰두하고, 책을 빨리 다독했다. 큰형과 달라 이놈은 잘하면 되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그해 10월 사시(14회) 1차에 합격, 우쭐했으나 2차례 연속 낙방하며 조급증을 타기 시작했다. “책을 보면 식은땀이 배고, 우유·계란 밖에 못먹었던” 시절이다. 그때 결혼(73년 1월)을 하고 큰형은 교통사고(5월)로 사망했다.


그는 장기전으로 돌렸다. 낮잠도 자고 밤에는 집에 와서 아들 기저귀 갈아주며 공부했고, 책상 앞에 써붙인 ‘수석 합격’도 ‘천직=소명’으로 바꿨다. 여유를 찾은 그는 16회 시험에서 자신감을 회복하고 17회에 도전했다. 75년 3월27일, 친구가 “무현아”라며 집으로 뛰어들었다. 합격자 60명속에 든 노무현. 아침 나절 말다툼으로 토라져 있던 부인은 그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집은 울음바다가 됐다.


〈이기수기자 k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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