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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경실련 초청강연 연설문 - 노무현 후보의 재벌정책 결정판
글쓴이 노무현 날짜 2002-10-08 오전 11:04:00
IP Address 61.73.125.230 조회 /추천 6733/255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초청강연 연설문]


‘신뢰받는 경제’를 위한 과제


2002. 10. 8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노 무 현


안녕하십니까.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저를 초청하고, 소견을 말씀드릴 수 있게 해주신 데 대해 경실련의 임원단과 회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경실련은 지난 89년 출범해 회원이 3만5천명에 이르는 대표적인 시민단체로 성장했고, 이제는 국제사회로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약자의 권익보호와 사회적 불평등 해소 등에 힘쓴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금융실명제 실시, 부동산투기 근절, 세입자 보호, 공명선거 캠페인 등을 통해 국민들의 공감대를 만들어 내고, 우리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선도한 주역입니다.

저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라는 명칭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경제정의’ ‘실천’ ‘시민’ ‘연합’, 이 단어 하나하나에 소중한 뜻이 담겨있다고 봅니다.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 민주적 권리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나라가 돼야 하고, 그것이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연대적인 실천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으로 인식합니다. 경실련의 이러한 설립취지와 활동방향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경실련과 제가 추구하는 지향점이 일치한다고 봅니다.

저는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이 많지만, 백화점식으로 이것저것 얘기하는 것보다는 재벌과 시장에 대한 소견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시장, 기업, 규제에 대한 기본적 인식

▶시장
시장은 자유롭고 공정해야합니다. 경쟁의 질서와 원칙이 준수돼야 합니다. 시장지배력이 남용되거나, 약자와 이해관계자의 권익이 부당하게 침해되어선 안 됩니다. 불공정한 시장에서는 효율도 정의도 기약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장은 기업경영에 대한 감시와 견제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시장은 경제의 최종감시자입니다. 따라서 불공정하고 불투명한 기업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기업
기업의 경영은 합리적이고 투명해야 합니다. 경영내역이 확연하게 공시되고, 회계감사가 중립적이고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배구조는 정상적이어야 합니다. 최대주주의 ‘황제식 경영’이 이루어져선 안 되며, 순환출자나 상호출자를 통해 소수의 지분으로 전 계열사를 부당하게 장악할 수 없어야 합니다. 이사회나 투자자와 소수주주의 의견은 정당하게 반영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당한 내부거래는 없어져야 합니다. 또 편법과 탈법을 통한 부(富)와 경영권의 부당한 세습은 막아야 합니다.

▶규제
저는 모든 규율은 시장기능에 의해 작동돼야 한다고 믿습니다. 기본적으로 경제활동을 위한 의사결정의 권한과 책임은 각 경제주체의 몫입니다. 시장과 기업에 개입하는 정부의 권한과 기능은 적을수록 좋 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국가가 개입해야 하는 사안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정하고도 자유로운 시장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제입니다. 또 하나는 공동체의 삶과 개인의 행복추구권 같은 또 다른 가치를 위한 규제입니다. 환경이나 안전, 인권, 질서유지 등과 같은 사회적 규제가 그것입니다.
시장질서를 위한 규제로는 독과점 관리, 회계 경영 공시, 투자자, 소비자, 소수주주 보호제도 등을 사례로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공정한 경쟁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시장기능의 보완이고, 세계 모든 나라가 취하고 권장하는 ‘글로벌 기준’입니다.

■ ‘국민의 정부’ 재벌정책의 평가

‘국민의 정부’가 취한 재벌개혁은 방향이 옳았고,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비뚤어진 신화를 믿고 외형 부풀리기에 골몰하던 부실한 대기업들을 대대적으로 정리했습니다. 부채비율은 획기적으로 낮아졌습니다. 사외이사제 도입, 기업회계 개선 등 기반강화에도 성과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과정을 한국경제사에서 처음으로 시행한 본격적인 기업구조조정과 선진화 작업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이러한 재벌개혁의 기조는 지속돼야 합니다.
그러나 정권 말기에 들면서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각종 규제장치들은 퇴색하고, 재벌기업들의 행태는 다시 종전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부 그룹에서 '선단식·황제식 경영'이 재연되고, 여전히 편법을 이용한 상속과 증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부당한 내부거래는 계속 적발되고 있습니다. 경영투명화를 위한 제도들은 후퇴하거나 진전이 없는 것이 작금의 상황입니다. '위기재발'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나오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 주요 재벌정책의 방향

저는 기본적으로 우리 대기업집단의 왜곡된 지배구조와 불투명한 경영, 불공정한 경쟁, 부당한 세습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경쟁력 있는 상품과 뛰어난 기술로 시장을 확대하는 것은 기업의 존재이유입니다. 대기업들이 우리경제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드러난 문제점과 폐해를 시정하지 않고는 우리기업과 경제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제도를 중심으로 필요한 과제와 추진방향을 간단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재벌정책의 선진화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증권관련 집단소송제는 조속하게 시행돼야 합니다. 이는 소수주주 등 이해관계자를 위한 수단이고 국제적으로도 통용되는 룰입니다. 법안에는 적용대상을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어 큰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우선 증권분야에 한해 시행한 뒤,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점진적으로 대상을 확대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부당한 세습은 근절돼야 합니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재벌가의 어린아이가 수십억원의 주식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세금만 적정하게 냈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천억원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상속세나 증여세는 수십억원, 많아야 몇백억원을 낸 게 고작인 것이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실상입니다. 이로인해 부(富)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왜곡되고, 기업이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상속·증여세를 완전 포괄주의로 바꾸겠습니다. 유형별 포괄주의로 과세범위를 넓혔지만 여전히 이것만으로는 편법적인 상속·증여를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면세점이 높고, 각종 공제제도로 실제로 국민의 1%만이 상속·증여세를 내는 게 현실입니다. 앞으로 상속·증여세를 완전포괄주의로 전환하더라도 실제로 세금부담이 늘어나는 계층은 극히 일부에 국한될 것입니다.

▶재벌정책의 효율화
-현행 출자총액제한제도와 상호출자 및 상호지급보증 금지제도는 그대로 유지하겠습니다.
출자총액제한제도는 기본적으로 자산총액 5조원이상인 기업군에 한해 과거와 같은 무리한 업종확대와 선단식 경영을 지양토록 하는 제도입니다. 앞으로 대기업그룹의 경영행태가 글로벌 기준에 부합할 만큼 개선되고, 정부의 감독기능과 시장에 의한 감시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게 되면 단계적으로 폐지할 것입니다. 자산총액 2조원이상 기업에 대한 상호출자와 상호지급보증 금지제도는 기본적으로 주식회사 제도에 대한 건전성 감독 차원의 규제이므로 중장기적으로는 대상을 일반화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경영투명성 제고
-사회이사제도부터 개선돼야 합니다. 2001년말 현재 사외이사를 보면 지배주주와 경영진에 의해 선임된 사외이사가 80%를 넘고, 의안찬성률은 99.3%에 달합니다. 이래서는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사외이사 선임과 관련된 전문성과 경력기준 등이 보강돼야 하며, 성과에 대한 보상기준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함께 결산내용의 공시가 적기에,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스톡옵션 등 경영자에 대한 보상내역도 명쾌하게 공시해야 합니다. 외부감사도 공정하고 중립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금융의 자율성·책임성 강화
-산업자본과 금융기관은 영역과 관계를 분명하게 설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제위기를 맞은 것도 재벌기업이 계열 금융기관을 통해 무리하게 대출을 받고, 그 부실이 누적된 것이 근원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금융기관의 자산은 고객의 자산이며, 이 자산은 독립적이고 건전하게 운용돼야 합니다. 산업자본의 사금고로 이용돼 또다시 동반부실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저는 중장기적으로는 금융전업그룹의 육성을 추진하되, 단기적으로는 금융회사를 이용한 계열기업간의 불공정한 자금지원을 억제토록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대기업그룹이 금융회사의 대주주인 경우, 지배주주와 금융회사에 대해 대출제한 등을 제대로 준수하고 있는 지를 엄격하게 감시하겠습니다. 건전성 감독차원에서 제2금융권 금융회사에 대해서도 지배주주에 대한 감독 및 검사규정을 만들 계획입니다. 이와함께 금융기관 대주주에 대한 적격성 기준을 마련해 대주주의 건전성 저해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습니다.
-특히 대기업그룹 계열사인 금융회사가 불법적인 지원을 반복하는 등 금융의 건전성을 현저하게 위반하거나 금융질서를 어지럽힐 경우, 금융감독기관이나 공정거래 당국이 법원에 해당 금융기관의 계열분리를 청구할 수 있게 하는 계열분리청구제도를 도입할 계획입니다.

▶감독의 독립성 제고
-재벌과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의 공정성에 시비가 이는 것은 이들의 중립성이 의심받기 때문입니다. 저는 금융감독위원장과 공정거래위원장 임명 때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거치도록 하겠습니다. 위원회 구성에 대해서도 중립성이 확보되도록 관련제도를 보강하겠습니다.

▶행정규제의 폐지
-시장의 질서유지를 위해 필요한 제도를 보강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불필요한 규제는 없애겠습니다.
-우선 관치(官治)의 잔재로 남아있는 규제는 과감하게 폐지하겠습니다. 과거 관 주도시절의 틀에서 만들어진 각종 인허가 등이 대상이 될 것입니다. 행정지도 형태로 기업에 요구하는 규제도 철폐돼야 합니다. 규정에 없거나 근거나 온당치 않은 준조세 등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매모호한 규정도 정비하겠습니다. 요건이나 범위 등이 불분명한 규정 때문에 담당자의 자의적 해석을 낳고, 결과적으로는 부정부패를 유발하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꼭 필요해 규제를 신설해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적용기한을 명시토록 제도화하겠습니다. 행정규제부터 투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행정규제 폐지는 경제단체와 협의해 대상을 선정하고 추진과정을 함께 점검토록 하겠습니다.

■ '경제정의'가 구현돼야 합니다.

저는 늘 '존경받는 부자, 신뢰받는 기업'을 주장해 왔습니다. 경제적 부(富)의 크기나 기업의 규모가 문제시되어선 안됩니다. 돈은 많이 벌어야 합니다. 기업은 좋은 상품과 기술로 시장을 넓히고, 고용을 늘려나가야 합니다.
문제는 그 과정입니다. 공정하지 않고, 투명하지 않은 과정을 통해 부가 축적되고, 행사되고, 세습되기 때문에 불신이 생기고 위화감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국민통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계층과 지역과 이념의 갈등을 극복하고 국민적 역량을 하나로 모아 신동북아시대라는 새 희망을 향해 매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 공정·투명·원칙·자율·분권의 가치가 정립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경실련에서 추구하는 '경제정의'라고 믿습니다.
이 땅에 참다운 '경제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도 힘을 모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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