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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씨, 지금이라도 서울대 진학하세요
날짜 2002-12-02 조회 4202
* 필자 : 이봉렬

저는 4년제 정규대학을 다닌 적이 없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야간에 공부를 해서 지방의 전문대를 겨우 마쳤을 뿐입니다.

공고를 마치고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규모의 대기업에 취직한 이후, 굳이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안정된 직장이 만족스러웠고, 넉넉치 않은 집안의 큰 아들로 가계에 도움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었기에 직장생활에만 충실했습니다.

그러던 중 야간대학이라도 가야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게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회사 밖에서 비슷한 또래끼리의 모임에 하나 가입을 했는데, 모임을 갖던 첫날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이름은 김아무개구요, 89학번이에요……."
"저는 박아무개인데 , 87또래구요……."

처음엔 "89학번, 87또래"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소개가 진행되면서 그것이 몇 년도에 대학에 입학했는지를 말하고 있음을,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 나이대신 학번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소개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잘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그때 심한 자괴감을 느꼈고, 그 후로 다시는 그 모임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그 후로 저는 오직 "학번" 하나 갖기 위해 진학을 결심했고, 당시 회사 근처에 있던 전문대학의 야간반에 들어가 낮에는 직장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녔습니다. 고등학교 때 전공과 동일계열이면 가산점이 있다고 해서 당시 직장에서 하는 일과 별 상관이 없던 학과를 선택했고, 배움에 대한 갈급함보다는 졸업장 하나에 목표를 두고 2년이라는 시간을 학교에 투자했습니다.

고작 자기소개에 필요한 "학번" 하나와 "졸업장"을 위해 들어갔던 학교라 무엇인가를 배우겠다는 의지도, 학교에 대한 애착도 거의 없었습니다. 차라리 기술을 익혀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꿈이라도 있었던 고등학교 시절에 더 많은 것을 배웠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그 졸업장이 필요했던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돌아다보면 차라리 그때 학교에 투자했던 시간과 돈의 절반이라도 책이나 다른 취미활동에 쏟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모습일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도 하게 됩니다.

저의 부끄러운 지난 이야기를 이렇게 늘어놓은 것은 최근 노무현 후보의 학력에 대한 몇 가지 씁쓸한 일들 때문입니다. 그 일들은 단지 "학번"과 "졸업장" 때문에 2년이라는 시간과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해야 했던 제가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서울대 졸업장 하나를 위해 4년을 투자하라는 말도 안 되는 조언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 신문(중앙)의 만평에 "상고 출신의 노무현 후보에게 경기고 출신의 김근태 의원이 경선에서 지고 있는 것은 학교망신"이라는 그림이 실려 파문이 일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런 저급한 사고를 가지고도 신문에 만평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을 뿐이었습니다.

며칠 뒤 또 다른 신문(동아)의 만평에 노무현 후보의 상고 졸업에 시비를 거는 그림이 또 실렸습니다. 이 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신문(발행부수 기준)의 사고 수준을 확인하는 순간 화보다 짜증이 먼저 났습니다.

대통령의 학력(學力)보다 학력(學歷)에, 능력보다 대학 졸업장 여부에 더 관심을 갖는 이 나라 언론의 수준에 짜증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대학 졸업장 여부에 목을 거는 것은 언론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 평상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진리를 보는 태도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 후보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시대의 아픔을 모른다."
서울대 출신 한나라당 경선 후보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입니다.

언론과 서울대 출신의 정치인에 이어 서울대 출신의 대학교수들도 거들고 나섭니다.
"실례된 표현이지만 대학 문턱에도 안 가본 사람의 머리 속에 무슨 거창한 이념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자칫 혼탁해질 수도 있는 각 정당의 경선과정을 올곧게 이끌기 위해 감시활동을 하고 있는 시민단체에 몸 담고 있는 상지대 정대화 교수가 이인제 후보의 색깔론 공세를 비판하는 글의 일부입니다.

그 글이 노무현 후보의 학력을 문제 삼기 위한 글이 아니었고 정 교수의 뜻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학문턱에도 안 가”보았지만 반듯한 이념으로 무장하여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수 많은 사회 활동가들을 기억하고 있는 저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백 번을 양보하더라도 "대학 문턱에도 안 가본 사람의 머릿속에”는 거창한 이념이 없을 것이라는 데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 글이 노무현 후보에게는 “실례된 표현”이 아닐지 몰라도, “대학문턱에도 못 가본” 많은 이들에게 분명 “실례된 표현”이었습니다.

덕성여대 교수인 이원복 화백이 서울대 동창회보에 노무현 후보의 상고 졸업을 비꼬는 만화를 실은 것도 최근의 일입니다. 서울대 출신이 상고 출신이라는 장애물을 뛰어넘을 준비를 하고 있는 그 그림에서 학벌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느끼는 것이 저 혼자만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 변호사, 국회의원, 장관으로서 살아온 삶이 단지 서울대 출신 앞에 놓인 상고 출신의 장애물로 그려지는 현실이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그러고 보니 민주당과 한나라당 경선에 참여하고 있는 후보 7명 중 노무현 후보를 제외한 나머지 6명이 모두 서울대 출신입니다.

당내경선을 치르는 중에도 이처럼 많은 이들이 후보의 학벌에 시비를 거는데,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의 후보로 선정되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상고졸업을 문제삼을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래서 서울대를 나오지 않은 유일한 후보인 노무현 후보에게 지금이라도 다시 공부해서 서울대에 들어가기를 권하는 것입니다.

독학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실력이면 서울대 들어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두 당의 경선에 나선 후보들의 언행을 통해 그 수준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서울대에 들어가는 것이 별다른 능력을 요구하는 일은 아니라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

언론에서 노무현 후보의 학력을 문제 삼는 기사나 만평을 볼 때나, 서울대 출신의 후보들의 입을 통해 ‘대학도 못 나온 사람’에게 퍼 붓는 독설을 들을 때마다 저 같이 공고나 상고 출신들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습니다.

장관까지 지낸 사람도 대학 졸업장이 없어 저런 대우를 받는데, ‘우리 같은 사람이야 오죽 하려고’ 하는 패배감도 느낍니다.

이제껏 좋은 대학 가지 못한 것이 아쉬움은 될지언정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학력(學歷)보다는 학력(學力)이 더 가치 있고, 학력(學力)보다는 사람 됨됨이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노무현 후보가 ‘상고밖에’ 나오지 못한 것이 공격의 대상이 되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깔봄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서 이제까지의 제 생각이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차라리 노무현 후보도 서울대에 진학해서 대통령선거 기간 중에 학벌이 주요 의제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해 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논의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학벌우선주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저 같은 소시민이 학벌에 대한 공방 속에서 자괴감에 빠지는 일은 줄어들 테니까요.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부모의 학력을 조사할 때의 기억입니다. 대학을 졸업한 부모를 둔 아이들이 손을 번쩍 번쩍 치켜들 때, 전 맨 마지막 순서에 누가 볼 새라 머리 위로도 손을 올리지 못하고 주위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손이 올라갔다 내려오는 그 짧은 순간 평생을 힘들게 살아오면서도 자식만큼은 올곧게 키우기 위해 애쓰시던 부모님을 한없이 원망했습니다.

지난 총선 이후 ‘386세대’(30대-80년대학번-60년대생)라는 말이 한참동안 유행이었지요. 그 뒤를 이어 ‘297세대’라는 말까지 만들어져 가끔 신문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더군요.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같은 나이로, 같은 시대를 살면서, 같은 고민을 하면서도 그 알량한 학번이 없어 무대 뒤편에 자리 잡아야 했고, 지금도 그 설움을 속으로 삼키고 있습니다.

대학 졸업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된 이 병든 사회 분위기를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언젠가 우리 아이들도 부모의 최종학력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성실하게 살아온 대다수의 국민들이 대학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못 배웠다는 이유로 평생 자녀들에게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요즘 노무현 후보의 학력(學歷) 때문에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그것이 노무현 후보의 책임은 아니지만 그 상처의 치유만큼은 대학을 다닌 적 없는 노무현 후보에게 떠 맡기고 싶습니다.

대통령 당선여부를 떠나서 대학 졸업장이, 서울대라는 간판이 사람의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이 부끄러운 현실을 고쳐나가는 일. 서울대 졸업장이 상고 졸업장을 공개적으로 깔보고 비웃을 수 있는 이 지독한 학벌주의 세태를 바로잡는 일.

이 일을 대학 문턱에도 못 가본 저와 대다수 국민들의 절박한 심정을 담아 고졸이 최종학력인 노무현 후보에게 지금 이 순간 또 하나의 숙제로 내어 놓습니다. 덧붙여 서울대 출신의 다른 후보 중에서 이 일에 함께 나설 수 있는 인물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2-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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