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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어법 - 내가 반한 노무현의 연설
날짜 2002-12-02 조회 3776
* 필자 : 사진기자

내가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는 생업마저 포기하고 정상적인 인간의 생활을 과감히 버린채 이 게시판에 목매달고 계시는 많은 분들과 같습니다. 5공청문회, 3번의 낙선, 조선일보 박살내기, 신념, 의지, 지조, 상식, 원칙, 도전....

그 중에 제가 노무현 후보에게 완전히 뿅 가버린 장면이 있었습니다. 최근 노무현의 어법이 화제가 돼서 한 자 올립니다.

저는 모 일간지의 사진기자였습니다. 92년 대선 때 민주당 수행기자를 했었지요. 그때 민주당은 평민당이 재야세력을 영입하여 신민주연합당으로 잠시 이름을 바꾸고, 노무현 의원을 포함한 3당통합에 반대한 의원들이 만들어 지키고 있던 (꼬마)민주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을 만들었을 때였지요.

사진기자들은 대선유세를 수행취재할 때 하루에 두 번 취재를 합니다. 취재한 사진을 전송해야 하기 때문에 당시 김대중 후보의 모든 유세를 일일이 따라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내일의 일정표를 보고 사진기자들끼리 상의해서 취재할 두 곳을 정한 다음에, 후보가 도착하기 1시간 전쯤 미리 유세장에 도착해서 전송기 설치하고, 전화라인 확인하고, 간이 현상시설 준비를 마친 뒤 후보를 기다립니다.

김대중 당시후보가 연설을 마치고 나면 연단 뒤에서 부랴부랴 현상을 하고 필름을 골라서 전송기에 걸어놓고 본사에 전송을 합니다. 이 과정이 대략 3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립니다. 물론 그 사이 유세단은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죠. 이걸 마치고 나면 점심을 먹고 오후 취재 장소로 이동합니다.

얘기를 하려다보니 민주당 출입 사진기자를 하면서 노무현 후보의 연설은 질리게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 왜인지 지금 얘기하려고 하는 장면만 또렷하게 기억이 나네요...

그때 민주당의 유세는 호남지역은 포기하고 특히 영남지역을 군단위로 샅샅이 훑어 나가는 방식이었습니다. 호남지역은 마지막 유세하는 날 오전에 광주, 오후에 전주, 딱 두 번만 했었습니다.

그 날은 대구 유세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제가 고향이 대구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때 내가 민주당 출입기자라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족과 대구에 있는 친척들을 엄청 못마땅하게 만들었습니다. 별 걸 다 못마땅해 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제 또래 즉 40대 초반의 대구 사람이면 다들 이해할 겁니다.

지역감정의 본산 대구. 저는 제 고향 대구를 아주 사랑하지만 대구사람들은 정말 이 갈리게 싫어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판단의 유일한 기준은 오로지 김대중입니다. 선거에서 김대중을 떨어뜨릴 수 있다면 아마 요즘 최고의 스타인 아톰 할아버지가 출마해도 몰표 몰아줄 사람들입니다. 이건 너무 심했나요?

암튼 지긋지긋한 지역감정의 소굴인 대구에서의 민주당 유세... 저는 사뭇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 있었던 김천, 안동, 경산 등의 유세는 그런대로 분위기가 좋았었는데, (기자는 엄정중립을 지켜야 하는데 그때 저는 사실 그렇지 못했습니다. 대선개표가 끝난 뒤 김대중씨가 당사로 나와서 정계은퇴 성명을 읽어나가던 그날의 새벽, 냉정해야될 저도 같이 울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대구는 하도 이상한 동네가 돼놔서 사람이 하나도 안오면 어떡하나, 미친 넘들이 돌팔매질이나 하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이 마구 들었었습니다.

그 당시 영남지역의 찬조연사는 노무현, 김정길, 홍사덕 의원이 주로 맡았습니다. 김정길 의원은 제가 존경하고 흠모하기로는 노무현 후보와 막상막하인데 이 분의 주요 레파토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얘기 많이 하실 겁니다. 김대중이가 깜은 깜인데...(대통령감이라는 얘기죠...) 색깔도 좀 이상한 것 같고, 감옥도 하도 많이 가서 과격할 것 같고, 그래서 못 찍겠다... 그런데 여러분, "알부남"이라고 아십니까? "알고보면 부드러운 남자", 이걸 줄여서 알부남이라고 그러는데 우리 김대중 후보가 바로 "알부남"입니다."

홍사덕 의원은 왜 김대중이어야 하는가를 비교적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는 스타일이었고, 김정길 의원은 아주 부드러운 어투로 경상도 유권자들에게 애절하게 사정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김의원 뿐만이 아니고 그때 민주당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영남에서는 무슨 죄 지은 사람처럼 조심조심 그랬습니다.

다시 대구 얘기로 돌아와서 대구 유세장은 두류산 공원이었습니다. 걱정했던 대로 사람 별로 안 모였습니다. 김대중 후보가 도착하기 전에 직전 유세장에서 연설을 마친 찬조연설자가 릴레이식으로 차례차례로 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정길의원이 연설하고 있을 때쯤 홍사덕 의원이 도착하고, 김의원은 연설을 마치자 마자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는 식이었지요.

취재할 준비를 다 마치고 담배를 피면서 칠레팔레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노무현 의원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착하자 마자 바로 연단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어땠는지 아십니까? 보통 연설 시작할 때는 인사말부터 해야되는 거 아닌가요? 이 양반 바로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대구 시민 여러분!! 여러분이 주인입니까? 여러분이 진정 이 나라의 주인입니까?"

아니, 저 양반 뭐 잘못 먹은 거 아냐? 아니, 다른 곳도 아닌 대구에 와서 살살 달래도 될까말까 한 판에 연단에 오르자마자 다짜고짜 따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주인이라면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주인 노릇 한 적 있습니까? 주인이라면 주인답게 대통령은 이런 사람을 시켜야 되겠다, 국회의원은 이런 사람을 뽑아야 되겠다, 이런 거 단 한 번이라도 냉정하게 생각해서 투표한 적 있으십니까?"

아무리 유세장에 온 사람들이 그나마 민주당과 김대중후보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만 왔다고 하더라도 저건 너무 심한 거 아냐? 나는 정말 조마조마 했습니다. 연단 뒤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나는 담배불을 끄고 연단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대구시민 여러분이 지금까지 어떻게 투표했습니까. 지역감정. 오로지 그거 하나에 의존해서 투표해왔던 거 아닙니까? 그러고도 여러분이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때부터 나는 정말 완전히 뿅가기 시작했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던 누군가가 생각납니다. 그런데 그 양반, 호랑이 잡으러 갔으면 호랑이를 잡아야지, 잡을 생각은 안하고 같이 노닥거리기만 하다가 정말 나라 말아먹었었죠. 그런데 노무현의원은 호랑이 굴에 들어와서 호랑이들한테 정말 몽둥이질을 해대고 있는 겁니다. 노무현, 노무현, 내 비록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용감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나서 노태우, 김영삼을 마구 조지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이라는 사람들이 그따위로 사람을 뽑으면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뭘 배우겠느냐, 여러분이 주인이라면 이차저차 해서 오로지 한 길로만 걸어온 김대중 후보를 당선시키는 거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벌써 10년 전 얘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좀더 자세히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저만 뿅간게 아니고 그때 같이 갔던 기자들,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보나마나 사람들 눈치 슬슬 보면서 그곳까지 찾아오셨을 청중들 전부 다 뿅 갔습니다.

최근 이 사이트에서 살림살기 시작할 무렵, 그때의 그 연설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글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어쨌거나 지역감정의 심장부 대구에 가서 하늘처럼 모셔야할 국민들을 앞에다 놓고 면전에다 대고 그렇게 직설적으로 퍼부을 수 있는 정치인,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지구상에 노무현 후보 밖에 없을 겁니다.

그의 직설적인 어법, 그것은 말을 하는 기법의 차원이 아니라, 겉과 속이 올곧게 일치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상징과도 같은 것입니다. 말을 할 때 이 눈치 보고 저 눈치 보는 사람이 노무현과 같은 감동의 정치역정을 밟아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지요.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결정이 되면 그의 스타일도 변해야 하긴 할 겁니다. 하지만 그의 직설적인 어법, 그것 때문에 불안하다, 과격하다 꼬투리를 잡히게 하는 어법을 혹시 바꾸지 않더라도 크게 손해볼 것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노무현 후보와 우리가 이제부터 정말 본격적으로 함께 싸워야 할 첫번째 목표, 지역감정, 지역구도, 이거 얼르고 달래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면돌파의 정치인" 노무현에게 기대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념문제, 이거 고운 소리로, 아름다운 말로 해서 해결될 문젭니까? 그리고 서론, 본론, 결론 이렇게 논리적으로 접근해봐야 어지럽기만 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이 두 문제에 관한 한, 노무현 후보가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어조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전의 정이 없는 인간들은 화나게 만들고, 그나마 양심있는 분들은 부끄럽게 만들고, 지역구도, 이념논쟁에 신물나 있는 사람들에게는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주어야 합니다.

노무현 후보를 앞장세우는 이번 대선은 기존의 지역대결 구도와는 좀 다릅니다. 영호남의 대결이 아니라 지역감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든 지역구도를 깨뜨려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대결입니다. 최소한 노무현 후보의 깃발 아래에서는 지역감정, 이거 이미 극복됐습니다. 국민통합 이루어졌습니다. 극복한 사람과 극복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그리고 통합된 국민들과 통합하기 싫어하는 수구들과의 전선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노무현의 직설적인 어법, 이거 누가 흉내내려고 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진정 올바르게 살아왔고,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정도를 지켜왔던 노무현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설레는 가슴으로 기대합니다. 소위 말하는 노무현 후보의 과격돌출 발언을...

(2002-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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