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로그인회원가입 마이페이지사이트소개사이트맵English
 
추천동영상
Best of Best
100문100답
 
 
Home>있는그대로보기>처음부터알기>100문100답
노무현 현상에 대한 ‘정치학’적 분석/정상호
날짜 2002-12-02 조회 1041
* 필자 : 정상호

1. 서론: 狂氣에 대하여

1968년이라는 시간적 단위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 5월 학생봉기가 발발하였을 때 프랑스의 유명한 사회사상가인 Edgar Morin은 그것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여명이며, 청년들의 연대정신이 일궈낸 위대한 축제”라고 환호하였다. 그러나 르 피가로(Le Figaro)에 실린 Morin의 기고문에 대해 당대의 국제정치학자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은 그것은 “이성보다 감정을 중시하는 철없는 젊은이들이 벌리는 사이코 드라마로서 문명을 암흑으로 만들 것”이라며 경멸하였다.
시공간을 달리하지만 2002년 서울에서도 하나의 현상에 대해 한쪽에서는 희열(ecstasy)로 다른 한쪽에서는 집단적 정신착란(delirium)으로 상반된 해석을 내리는 있는 유사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당의 이인제 후보는 “독일의 나치정권, 아르헨티나의 페론정권 등 狂氣로 해서 망한 나라가 많은데, 걱정스럽게도 지금 특정 후보가 광기와 분노의 불꽃 위에 올라 있다”며 우려스러운 불만을 표명하였다.
오늘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무현 현상은 바람이 아니라 狂氣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광기의 본질은 이인제가 지목한 히틀러식의 광기가 아니라 프랑스의 유명한 정치학자 졸버그(Aristide R. Zolberg)가 1848년 2월혁명, 1871년 파리코뮨, 1945년 파리해방, 1968년 5월봉기에서 찾아난 공통된 기저, 즉 광기의 순간(moments of madness)에 근접해 있다. Aristide R. Zolberg, “Moment of Madness”, Politics and Society, Vol. 2, No. 2, 1972(Winter).

졸버그는 프랑스에서 가장 분명하게, 그리고 주기적으로 발발하였던 이러한 광기의 순간들을 관통하고 있는 본질을 ‘모든 것이 가능하다’(all is possible)고 여기게 되는 시민들의 공유된 믿음에서 찾고 있다. 광기의 시간 이전에는 진실을 왜곡하는 장애물과 제약을 강조하는 부정과 회의의 시선이 압도한다. 그러나 부단한 정치적, 역사적 성과와 진전에 힘입어, 그리고 결정적 계기가 도래하면서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체념은 일순간에 철회된다. 시몬느 보봐르의 표현을 빌자면, 이 순간에 이르러 정치는 개인들의 삶과 무관한 영역에서 시민들의 일상 영역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치적 광기는 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졸버그는 제도화된 현대의 정치과정이 보다 드라마틱한 정치과정을 바라는 ‘시민들의 지속적인 열망’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졸버그에 따르면, 광기의 순간들은 참여적 행위에 의해 시민들의 열망과 제약적 정치과정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는 역사적 진보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 가지 방향에서 중대한 사회적 변화를 유발하게 된다.
첫째, 광기의 순간을 지나면서 처음에는 소수 분파나 종파에 의해 제안된 새로운 아이디어가 보다 많은 대중들 사이의 공유된 믿음으로 발전하며, 사회구성원들은 강력한 집단학습을 경험하게 된다. 둘째, 새로운 언어로 표현된 이러한 믿음들은 새로운 네트워크와 세력들을 구축시켜 놓는다. 끝으로 정책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시기에 제안된 새로운 정치제도와 프로그램은 때로는 먼 미래에 실현되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 사회의 확고한 목표로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다.
졸버그는 거시적인 역사적 관점(macro-analysis)에서 파리코뮨이나 68년 봉기를 분석하였다. 졸버그의 광기에 대한 분석을 특정 후보의 지지도 급상승과 같은 미시적 사건에 적용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무리를 무릅쓰고 노무현 현상을 졸버그의 시각을 빌려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노무현 현상 역시 근본적으로 "시민들의 변화 열망을 반영하지 못한 한국정치체제의 낮은 수용능력’에 기인한다는 것 때문이다. 퇴행적 보수주의자의 눈으로는 집단적 변화욕구의 급작스런 표출이 “이해할 수 없는 광기나 음모”로 비쳐지겠지만 역사적 시각에서 본다면 자연스런 사회적 현상일 뿐이다. 이제 노무현 현상을 낳은 구조적 원인과 그것이 우리 정치사에 전례가 없던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역사성을 갖고 있는 반복된 사건임을 살펴보자


2. 2002년 노무현과 1971년 김대중: 대안의 조직화

노무현과 김대중의 공통점은 한국과 같은 학벌사회에서 고졸의 학력으로 성공한 이례적인 정치인이라는 데 있지 않다. 또한 보수언론으로부터 시대착오적 이념공세를 받은 피해자라는 점도 아니다. 가장 큰 공통점은 대안의 조직화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정치사에 있어 가장 역동적인 선거과정을 만들어 낸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샤트슈나이더(Schattschneider)에 따르면 대안이란 독자적 비전과 정책 패러다임을 의미하는데, 대안을 체계화하는 것은 최상의 권력수단이 된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정치적, 조직적 대안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은 정당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민주화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쉐보르스키의 합리적 선택이론의 핵심 중 하나는 대안이 조직화되지 않는다면 행위자들의 집단적 행위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안부재의 상황은 성공 확률을 낮추는 대신에 가담함으로써 지불해야 하는 참여자들의 비용(고문, 투옥, 취업 등등)을 너무 높여 놓기 때문이다.
대세론의 주인공이었던 이인제로서는 “불과 한 달만에 지지율이 급등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陰謀로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겠지만 1971년 대선은 그러한 현상이 전례가 없는 것이 아니며, 거기에는 보다 깊은 구조적 원인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 변화에의 집단적 열망과 낮은 수준의 정치제도화

졸버그는 무관심과 비관주의를 벗어 던진 광기의 순간들이 공포나 억압 혹은 카리스마적 권위주의에 뒤이어 발생하였음을 주목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치제도들은 계몽과 각성에 기반한 시민의 참여욕구를 수용하지 못한 채 억누름으로써 붕괴의 인계점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위로부터든 아래로부터이든 모든 정치적 변화는 대중의 집단적 기대와 욕구를 전제로 한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드러난 대중의 욕구는 ‘민주적 정권교체’로 요약할 수 있다. 1960년 이래의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1971년을 기점으로 ‘도시정치의 등장’이라는 주목할만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유사이래 처음으로 도시의 취업인구(5백만 8천명)가 농촌의 취업인구(4백 9십3만 8천명)를 앞서게 되었으며, 전문대학을 포함한 대학생 수는 1960년 4.19 당시의 두 배(163,932명)로 늘어났다. 고등학생 수는 더 놀라운 증가율을 보였는데 1950년 당시 262교 3,080명에 불과했던 것이 1971년에는 1012개교에 1,023,017명으로 무려 300여 배에 달하는 급증세를 보였다.
보편적으로 도시화와 교육의 대중화는 정치참여의 욕구를 증대시킨다. 그러나 1970년의 시점에서 시민들의 고조된 정치참여의 욕구를 수용하기에는 제도적 여건이 너무 취약하였다. 더욱이 박정희의 장기집권음모로 획책된 1969년 3선개헌은 정권교체를 통해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루겠다는 시민들의 기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학생, 재야, 신민당이라는 정치적 반대세력의 삼각축은 한일정상화와 3선개헌 반대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함으로써 느슨한 연대틀을 구축하였다. 정리하자면 1971년 선거는 정권교체라는 변화에의 욕구와 이를 일관되게 배제해 왔던 낮은 수준의 정치체제간의 긴장을 잠재하고 있었다.

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하였다고 자랑하는 김대중 정부 하에서 유독 정치는 개혁의 무풍지대였다. IMF 극복, 남북관계의 도약, 인권과 복지의 진전, 지식정보화의 발전 등 의미있는 개혁조치가 시도되었고 나름대로의 성과도 나타났다. 유독 정치개혁이 시도조차 되지 못하였던 이유를 집권당은 여소야대와 완강한 야당 등 상황적 요인 탓으로 돌렸지만 보다 본질적 원인은 DJ의 정치패턴이 3김 정치의 낡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는데 있었다.
노무현 현상은 이러한 정치권 전반의 ‘신뢰의 위기’를 자양분으로 하였다. 여야관계는 헌정사상 가장 대립적 양상을 보였으며, 정당, 선거, 국회 등 정치관련개혁입법은 임기 말인 지금까지 지체되어 왔고,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제왕적 대통령과 1인 보스 총재가 지배하는 정당구조가 비판의 초점이 되었다. 대통령의 친인척과 권력 실세 주변에서 연이어 발생한 각종 게이트, 인사정책의 실패, 각 정당의 지역주의 전략은 정치개혁의 당위성과 시급함을 확산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2. 현상의 根因: 게임의 논리와 구조를 바꾼 경선제

변화와 개혁에의 집단적 열망은 분명 전환의 기반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새로운 단계를 개척할 수는 없다. 한국의 진보정당사는 정치적 당위나 필연성은 사회적 균열과 지지기반을 조직화할 수 리더십의 형성과 대안적 프로그램 없다면 결코 현실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71년의 김대중 현상과 2002년 노무현 현상의 최대 공약수는 경선제라는 ‘제도의 의도하지 않는 효과’의 파괴력이다. 다시 말하면 앞서 언급한 변화에 대한 잠재적 열망이 경선제라는 제도를 매개로 분출되었고, 새로운 리더십의 등장이라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것이다.

1971년 대선을 앞둔 신민당의 최대의 적은 만연한 패배주의였다. 3선개헌 반대투쟁과정에서 상당한 내부진통과 당의 해산과 재창당이라는 우여곡절을 겪었던 신민당은 대통령 후보인 유진오 총재가 병으로 쓰러지자 구심점을 잃고 분열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유진오 체제 이후 당권을 장악한 유진산을 비롯한 주류와 비주류간의 반목은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들로 하여금 광범위한 실망감을 불러 일으켰다.
정권교체에의 열망과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제도권의 한정된 능력 사이의 긴장에 돌파구를 마련한 것은 김영삼의 40대 기수론이었다. 1969년 11월 8일 김영삼(42세)은 외교구락부 연설을 통해 “1971년의 평화적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패기 있는 젊은 정치세대가 거국적인 민주세력을 결집시키는 중대과업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며 40대 기수론을 제창하였다.
유진산은 “口尙乳臭의 어린애들이 무슨 대통령이냐”면서 반대 태도를 취했지만 세대교체론의 도도한 흐름을 꺾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40대 기수론은 3선개헌 이후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에 염증을 내기 시작한 국민들의 변화욕구와 성장일변도의 산업화 전략에 대한 도시노동자들의 반발심리와 결합되면서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초기에 수동적이었거나 관망하였던 이철승과 김대중이 동참하면서 대세가 되었고 마침내 유진산은 불출마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1970년 신민당의 후보경선은 40대 기수론을 제창하였던 김영삼의 확고한 ‘대세’로 시작되었다. 김영삼은 신민당 내 최대 파벌인 진산계의 핵심인물이었고 원내 총무를 다섯 번이나 역임한 화려한 경력을 가진 실세였다.
그러나 경선과정이 시작되면서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혼전의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우선 ‘이번에 패배하더라도 차기를 위해 표의 시위를 하겠다’며 단신으로 대의원들을 열심히 설득하였던 김대중의 지지가 점차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진산 당수에게 서약서를 제출하고 그의 추천권을 따르기로 하였던 이철승이 약속을 어기고 지명경쟁에 합류하면서 김영삼 대세론은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드디어 한국정치사에서 초유의 일로 기록된 신민당의 1971년 대통령 후보경선을 위한 지명대회(1970. 9. 29)가 시작되었다. 유진산의 추천을 받은 김영삼의 일방적 우위로 끝날 것이라는 언론의 예상과는 달리 1차 투표의 결과는 총투표 885표 중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백지 78표, 기타 4표로 김영삼은 과반수에서 22표가 모자라 지명획득에 실패하였다. 김대중은 이철승에게는 당권을, 이재형에게는 당수를 보장하는 비주류연합을 성사시킴으로써 2차 투표에서는 김영삼을 40여 표 차로 누르고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감동적인 장면은 뜻하지 않은 일격을 당한 김영삼이 단상에 올라가 김대중의 손을 잡고 승자를 인정하고 축하하는 모습이었다. 김영삼은 연설에서 “나와 같은 40대 김대중 동지의 승리는 신민당의 승리요, 바로 나의 승리다”라고 하면서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의 굳건한 협력을 다짐했다.

1970년 경선은 한국정치사와 정당민주화에 새로운 이정표를 남겼다. 이전의 대통령 후보는 권력자 자신이거나 아니면 권력자의 일방적 지명에 의해 이루어 졌다. 그러나 40대 세 후보의 선의의 경쟁과 결과에 승복하는 모습은 패배주의에 빠져있던 신민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야당의 변화된 모습에 국민들은 커다란 관심을 보여주었고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대는 1971년 선거에서 신민당으로 하여금 약진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40대 기수론이 패배주의에 빠져있던 신민당의 위기타개책이었다면 ‘국민참여경선제’는 分黨 직전에 놓인 민주당이 국면돌파를 위해 고심 끝에 선보인 비책이었다.
민주당이 올 초 미국식 예비선거와 호주식 선호투표제가 결합된 국민참여경선제를 발표하였을 때 그 내용은 물론 그것의 파급력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두 제도 모두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한 제도였고 7명이나 되는 후보의 난립, 지역주의적 투표경향 등 너무 많은 변수가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국민참여경선제는 잠재되어 있던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분출시킨 제도적 매개로 작용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제도의 도입을 고안, 주도하였던 당권파나 이인제로서는 지금은 ‘제 발등을 스스로 찍은 심정’일 것이다. 왜냐하면 당원과 대의원의 폐쇄적 참여로 진행된 기존의 후보선출방식이 적용되었다면 이인제와 권노갑의 주류연대가 그렇게 쉽게 붕괴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세 가지 점에서 이인제와 당권파에게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하나는 후보결정과정을 일반 국민들에게 개방함으로써 경선결과에 미칠 당권과 주류의 영향력을 최소화시켰다는 점이다. 오히려 50%에 달하는 국민참여경선인단의 선택이 전체 결과를 좌우하게 됨으로써 당내 역학관계보다는 국민여론에 민감한 게임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즉, 당권과 대의원 사이에 아무리 완강한 대세론이 구축되었다 하더라도 50%의 신규 진입자들의 선택이 보다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면서 ‘외압에 의한 대세론의 붕괴’ 가능성이 제고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50%의 구성원들은 기존의 행위자들과는 전혀 다른 참여자들이었다. 각 후보진영이 모두 선정 확률을 높이기 위해 대규모 조직동원을 시도하였지만 그 결과는 대체적 균형을 낳아 특정 후보군의 독점(대세론)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점차 선거 열기가 고조되면서 시민단체와 지지자들의 자발적 지원이 조직동원을 압도하게 되었다.
40대 미만, 그리고 여성의 참여지분 각각을 전체 국민선거인단의 50%로 규정하면서 청장년층의 구성이 당원이나 대의원 구성에 비해 과잉대표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청장년, 여성, 자발적 응모자로 구성된 50%의 국민선거인단은 당원이나 대의원들과는 달리 당권파나 주류의 대세론으로부터 덜 영향을 받는 지위에 있었으며, 거꾸로 (시민)사회의 여론과 압력을 여과없이 경선과정에 전달해 주는 매개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인제와 당권파에게 불리한 효과를 미치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은 ‘선호투표제’였다. 정당지지도 2위와 3위인 자유당과 국민당 연합이 부동의 1위인 노동당을 누르고 10여 년 째 집권하고 있는 호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선호투표제는 연대와 연합의 정치(coalition politics)를 유인하는 경향을 내재하고 있다. 1위가 압도적이지 못할 경우, 2위와 3위의 정책적촵이념적 거리가 크지 않을 경우, 1위의 과반수 획득을 보장할 후미의 안전판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선호투표제는 항상 ‘결과의 역전’을 낳기 마련이다.
경선과정이 본격화되면서 대세론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각종 토론회가 진행되면서 명시적 형태는 아니지만 느슨한 형태의 4자간 개혁연대(노무현, 김근태, 한화갑, 정동영)가 가시화되어 나타났다. 여론조사에서 2위부터 5위까지 두터운 중위를 차지한 개혁연대는 대세론의 강력한 대안으로 인식되었고 김근태의 사퇴는 실현가능성을 제고시켰다.
이 시점에서 이인제 대세론의 최초 붕괴시점, 혹은 노무현 돌풍의 최초 발화지점을 추적해 봄으로써 선호투표제의 영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2월까지의 모든 여론조사는 兩李후보의 대세론의 확고부동함을 보여주었다. 흔히들 노무현 돌풍의 공식적 자료로 이회창을 오차범위 내(1.1%)에서 리드한 3월 14일 문화일보 조사(TN 소프레스)를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인제 대세론의 붕괴조짐은 경선 돌입 일주일 전(3.5)에 실시된 한국일보(미디어리서치)의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다. 제주지역을 표본으로 실시된 한국일보 조사는 이인제(25.8%)가 노무현(17.3%)에 약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선호투표제 개표방식을 적용한 결과 놀랍게도 노무현(52.8%)이 이인제(47.2%)에 박빙의 승리를 거둘 것으로 예측되었다. 이 조사의 의미는 개혁연대의 표의 결집가능성을 증명해 주었으며, 보다 중요하게는 민주당 후보와 관련된 여론조사로는 처음으로 노무현이 1위에 올라섰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사람들 사이에서 ‘懷疑의 대상’(과연 될까)이었던 노무현 후보가 유력 대안(될 수 있다)으로 부상하였음을 알려주는 메시지였으며, 대안부재의 수동적 선택에 근거한 대세론의 붕괴의 서막을 알리는 弔鐘이었다.

국민참여경선제의 세 번째 의미는 새로운 정치균열을 촉발하였다는 것인데, 이것의 효과는 경선 전체를 좌우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3김시대의 특징이 적대적 공존관계였던 것처럼 이인제와 이회창의 대세론 역시 내부 지지자들의 대세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제주와 광주를 거치면서 이인제 대세론이 붕괴했던 것에 정확히 비례하여 이회창 대세론 역시 허망하게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쉐보르스키가 민주화로의 이행은 외부의 강력한 도전 이전에 내부의 분열(crack)에서 촉발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을 입증이나 하듯 국민참여경선제는 한나라당의 심각한 내부분열을 촉발하였다. 제왕적 총재 체제의 폐지와 전면적 당내 민주화를 내걸었던 박근혜의 탈당은 이회창 대세론의 파괴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이탈은 이회창 대세론의 양대 근거였던 영남의 지역적 기반과 보수세력의 분열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3. 절반의 승리

노무현 현상은 한국의 정치사와 정당정치의 발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결과와 상관없이 이미 절반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민주당으로 하여금 심각한 패배주의를 딛고 재집권의 가능성을 개척하여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식의 해석은 오로지 민주당원과 지지자들에게만 해당되며 자칫 노무현 현상을 편협하게 정파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노무현 현상은 한국사회의 합리적 개혁세력의 정치적 성장의 반영이자 결집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때의 합리적 개혁세력이란 특정 후보(소위 4자연대)와 의원그룹(쇄신파나 소장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좌우의 이념적 편향에 의한 구분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문제는 ‘개혁의 과잉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개혁의 결핍’ 때문이라고 믿으며 ‘개혁의 중단이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와 보다 효율적인 개혁’을 기대하는 시민들의 집합이다.
적지 않으나 산재되어 있던 한국의 합리적 개혁세력의 보편적 정서와 기대는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성공한 개혁의 계승: 햇볕, 복지, 벤처, 여성정책
② 실패한 개혁의 극복: 인사(지역)정책과 교육, 경제의 시장편향정책
③ 미완성 개혁의 발전: 언론개혁, 정치개혁

①부터 ③까지를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은 물론 정권의 재창출이다. 이인제 대세론의 근본적 한계는 필패론에 있던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는 ②와 ③을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다는 합리적 개혁세력 내부의 공유된 믿음에 있었던 것이다.
과거 민주화 운동의 정통성을 계승해 온 김근태가 아니라 우리사회의 현재적 질곡인 지역문제와 언론문제에 대해 일관된 개혁적 입장과 소신을 지켜온 노무현이 부상한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그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스타일이나 품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정치 내에서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고 해결방안을 실천하는 ‘정치적 능력’의 차이에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현상을 가져온 합리적 개혁세력의 양대 주축은 세대 차원에서는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30-40대의 청장년층이며, 지역적으로는 호남을 기반으로 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최종 결과와 관련된 통계자료를 얻을 수 없는 현재의 상황으로는 추론에 불과하다. 아무튼 이를 뒷받침할 몇가지 간접증거는 현재까지 경선을 치룬 8곳에서 이들의 선거참여율은 평균참여율보다 20% 정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새로운 정치실험이라 할 노사모 구성원의 절반 가량(48.6%)은 30대인 것으로 나타났다(문화일보, 2002. 4. 3). 또한 이인제 대세론이 강고했던 시기와 노무현 대안론이 확산되는 시기의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두 가지 분명한 흐름 역시 이를 입증하고 있다. 하나의 흐름은 무응답층의 상당한 감소(30~50%→10~20%)이며, 다른 하나는 30~40대 유권자층의 압도적 노무현 지지현상이다.
한편 노무현 현상의 지역적 기반은 호남이다. 광주의 선택이 없었다면 노무현 현상은 자칫 바람으로 그쳤을 수 있으며 적어도 지금과 같은 폭발력을 갖지 못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인제 대세론의 지역적 기반 역시 충청이 아니라 호남이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후보가능성을 묻는 모든 여론조사에서 이인제가 영남에서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원인은 호남에서의 압도적 지지에 근거하였다. 이인제에 대한 전체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호남지역의 강력한 지지를 보여주는 것으로는 <세계일보>, 2001. 11. 15일자와 <조선일보>, 2002. 1. 1.일자를 참조.

꽤나 강고하게 보였던 이인제 대세론 2001년 연말과 이듬해 초 민주당 후보선호도 조사에서 이인제는 노무현을 많게는 네 배(34.4% ↔ 9.6%, 문화일보, 2001. 11. 18) 적게는 세 배(50.4% ↔ 16.4%, 뉴스메이커, 2002.1. 10) 이상의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였다.
이 그렇게 쉽사리 무너진 까닭 역시 호남의 딜레마와 선택의 전환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호남인들에게 있어서, 각종 게이트와 측근비리로 상징되는 DJ 정권의 연이은 실정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진전을 위해 정권재창출은 외면하기 어려운 명제였다. 재집권이라는 지상 목표를 위해 호남인들은 정체성이 아니라 경쟁력을 최상의 선택기준으로 삼았으며, 호남후보불가론의 확산에 따라 한화갑 등 지역적 대안이 폐기됨으로써 이인제에 대한 독점적 지지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처럼 이인제 대세론은 신념과 원칙에 기반한 적극적 선택이 아니라 목표와 수단 사이의 불일치 상황(딜레마)에서 선택을 강요받았던 호남인들의 수동적 선택의 결과였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력과 개혁정체성을 동시에 갖춘 새로운 대안의 등장과 더불어 대세론은 허망하게 일순간에 무너졌던 것이다.
둘째, 노무현 현상의 긍정성은 이미 새로운 형태의 정치참여모델을 보여주었다는데 있다. 국민참여경선제가 발표되었을 때 각 후보의 전략참모들은 제주선거의 중요성을 잘 간파하였다. 미국의 뉴햄프셔州가 그렇듯이 최초 선거지역인 제주선거의 결과가 전체 국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하여 각 캠프의 자원을 집중하였다.
그렇지만 바로 뉴햄프셔에서 부시를 누르고 일약 ‘사이버 대통령’으로 도약한 멕케인의 정치적 의미를 주목하는 전략가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비록 공화당 후보 지명전에서 패배하기는 하였지만 온라인 선거방식을 전면적으로 채택함으로써 선거의 3대 요소인 자금, 홍보, 자원봉사자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였다. 맥케인은 “혼자서 기득권층과 싸우고 있으니 많이 도와달라”는 설득을 선거자금 모집에 활용하였고 인터넷(www.mccain2000.com)을 통해 선거기간 중 부시의 10배에 해당되는 3백 70만 달러를 모금하였다. 또한 Straight Talk Express를 설치하고 인터넷을 통한 국민과의 직접 대화를 성공적으로 운영하였다.

한총련이 개입되어 있든 아니든, 그들이 엄청난 비용과 방대한 조직을 갖고 있든 아니든 한국정치사에서 노사모는 선거방식, 나아가 정치참여모델의 새롭고도 성공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대중선거조직인 나사본이나 민주산악회에 비교해 볼 때 노사모는 동원조직이 아닌 자원조직이며, 하향적 외곽조직이 아닌 상향적 시민조직이고, 명망가 중심의 캠프가 아닌 다수 익명의 자발적 지원조직이다. on-line 방식을 통해 저렴한 비용이지만 대단히 효율적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대한 노사모의 실험은 한국의 선거사와 정당정치의 한 단계 진전을 가져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절반의 패배

노무현 현상은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 불안정성의 근거는 兩李와 언론재벌의 광기 어린 이념공세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대통령 후보로서의 성급함과 미성숙 등 정치인 노무현의 개인적 자질 문제 때문도 아니다.
불안정성의 근본 원인은 아직 노무현의 성공이 절반 짜리라는 데 있다. 앞서 우리는 노무현 현상은 대안을 성공적으로 조직화하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그러나 대안의 사전적 정의, 즉 ‘체계적이고 독자적인 비전과 정책의 패러다임’라는 점에서 그의 대안(alternatives)은 매우 불완전하다.

앞에서 살펴본 1971년 대통령선거가 한국정치사에 의미를 갖는 까닭은 단지 세대교체론의 한국적 형태인 40대기수론이나 경선절차의 제도화 때문만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최초로 정책경쟁, 정당경쟁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감각의 정치인’ 김영삼이 변화에의 대중적 욕구를 ‘40대기수론’으로 기민하게 간파하였다면 김대중은 ‘대중경제론’과 ‘대중민주주의’로 구체화시켜 나갔다. ‘중단없는 전진’으로 상징되는 박정희의 산업화 전략이 그간의 지배적, 보다 정확하게는 유일한 대안이었다면 김대중이 내건 ‘대중경제론’은 합법공간에서 최초로 제안된 대안이자 경쟁적 패러다임이었던 것이다.
의료보험과 산재보험의 실시,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운용, 서민중심의 세제개혁, 농민을 위한 이중곡가제 실시 등 대중경제론은 당시 급속한 산업화가 낳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정책처방과 비전을 체계화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금기의 영역이었던 남북문제와 안보문제에 있어서도 진보적 프로그램을 주저 없이 내세웠다. 중앙정보부, 예비군제, 교련, 연좌제 등 4대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였고, 한반도 전쟁재발을 막기 위해 미일중소 등 4강의 안전보장론과 비정치분야에서의 남북한 직접 대화를 제안하였다.
1971년 대통령선거는 비록 패배하였지만 장기집권과 일방적 산업화 전략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대중의 변화욕구, 새로운 리더십의 출현, 대안적 프로그램의 공식화가 제대로 결합되었던 최초 선거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대안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리고 1971년 "대중경제론"과 "대중민주주의"의 정교함과 비교한다면 노무현 현상은 자칫 바람으로 끝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노문현 자신의 철학과 비전이 유권자들을 강력하게 흡수할 정도의 독창성과 완성도를 지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불안정성의 두 번째 근거는 ‘조직’이다. 그가 후보로 확정된다면 이번 대선은 여당과 야당의 권력경쟁이 아니라 보수언론과의 전면전이자 재벌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과의 대회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 의한 무차별적 이념공세와 흑색선전은 피할 수 없는 주어진 조건이다. 문제는 냉전보수세력의 사활적 공세를 분쇄할 수 있는 ‘조직적 역량’을 갖추었는가 하는 점이다.
출마 당시 천정배 의원만이 그를 지지하였다는 데서 드러나듯이 노무현의 당내 기반은 대단히 열악하다. 민주화 경력과 개혁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 민주당 내 소장개혁그룹과의 연대 수준과 경험도 일천한 편이다. 노무현의 조직기반, 특히 지역조직은 전국적 범위를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참여경선제가 도입됐으니 다행이지 과거와 같은 조직중심의 전당대회였다면 그도 사퇴한 후보의 대열에 합류하였을지 모를 일이다.


5. 맺음말

노무현 현상이 한 바탕 바람이 아니라 역사의 발전적 추세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가 제시한 대안들이 보다 정교하고 실현가능한 방향으로 업-그레이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의 시대는 post-DJ 이지만 아직은 거기에 걸맞은 체계적이고 발전적인 청사진을 어느 누구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역공세를 저지하고 지지자들의 지원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조직적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 절대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차적으로는 정책정당, 참여정당, 민주정당 등 정당개혁의 청사진을 갖고 민주당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국민을 상대로 한 정치의 선전을 대선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의원그룹이나 지식인과의 정치적 연대를 강화시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렇지만 불순한 이념적 공세와 지역주의적 책략을 분쇄할 책임은 노무현이 아니라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정상호
정치학박사, 경제사회정책e아카데미 연구기획실장.


(2002-04-16)
 




copyright(c) 제16대 대통령 당선자 노무현 공식 홈페이지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