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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변호사를 만나고 나서
날짜 2002-12-02 조회 2154
* 필자 : 노혜경

어젯밤엔 문변호사가 출타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오늘 사무실로 찾아가 만났습니다.

참 아름답게 생기신 분이더군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역시, 어제 게시판에 가자고 글 올릴 때,
문변이 지금이라도 출마하겠다고 나서면 진짜로 후보를 교체하자고 주장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민주당과 노짱님의 고유 권한이고,
결정이 나기 전에라면 주장도 해볼 수 있었겠지만 이미 때는 지나갓지요.
문변이 노사모가 방문한다고 마음을 바꿀 사람이라고는 더더욱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노짱의 결정이 심사숙고끝에 모든 가능성을 타진하고 난 연후에 내린 결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결정이 지닌 의미--YS를 찾아가 만난 일까지 포함해서---에 담긴 문자 그대로 "사랑"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갔는가.
분명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한이헌일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를 말입니다.

정말로 의식없이 부산사람 대통령을 말하는
국보위 출신 한이헌을
어떻게든 당선시켜야 하는 이유는 노짱이 민주당에 재신임을 묻겠다고 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누구인든 민주당 후보를 당선시키는 것이 지역감정이라는 괴물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역통합은 어떤 인물을 내보내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민주당표 후보자에게 부산사람이 한표를 찍는 그 행위를 통해서 달성되니까요.

노짱이 틈만 나면 강조하는 링컨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노예해방에 대한 적극적 발언을 한 적이 거의 없었으며
모든 문제를 연방의 통합이라는 대명제 안에서 풀어갔다는 이야기.
그런데도 그는 그 어떤 아름다운 명분을 내걸었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흑인들의 지위를 향상시켰다는 이야기.

명분을 내세우는 일보다 인간의 실존적 비참을 줄이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정말 사랑을 하던 사람의 이야기를.

굳어지고 막무가내인 어떤 부산의 노인이
전라도에 대한 온갖 편견에 얼룩진 두뇌를 지닌 어떤 아줌마 아저씨가,
한이헌씨는 확실한 YS맨이라서,
한이헌씨는 경제통이라서,
시장선거는 정치논리가 아니라 일잘하는 사람이 누구냐를 보고 찍어야 하니까,
등등의 온갖 이유로 한이헌에게 한 표 찍었을 때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달라지겠지요.
행동했다는 사실이 그의 내면에 빛을 줄 겁니다.
자신이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민주당에 찍었다, 라는 바로 그 사실이 그에게 다른 감정의 결을 만들어줄 겁니다.

지난 광주 경선에서 노무현에게 표를 준 500여 명의 광주 시민에 의해
크나큰 화해가 시작된 것만큼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자신의 편견과 고집과 감정을 이기고, 지역감정이라 불리는 괴물에게 저당잡힌 자신의
순수하고 건강한 마음을 도로 꺼내어
민주당이라는 이름에 의식적인 한 표를 던질 때,
그리하여 그 후보가 당선이 될 때
이는 훨씬 아름다운 승리일 것입니다만,

주님의 날이 도둑처럼 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와도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안다는 것과,
결과가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을 신봉하는 사람들처럼
좋은 결과를 위해 뛰는 것과는 참 다르겠지요.
머리가 안다는 것과,
내 가슴이 그 앎을 받아 안는다는 것과,
내 몸이 그 앎을 실천하기 위해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과는
같은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나는 노무현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꼭 이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김을 통해 우리 부산이
이제야말로 그 지긋지긋한 괴물에게서 놓여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도둑처럼" 이기는 것이 싫었고,
당당하게, 떳떳하게 이기고 싶었습니다.
아니, 못 이기더라도 노풍의 의미는 퇴색하지 않는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나,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오늘 비로소 깨닫습니다.
노무현이 아니라, 바로 우리 부산사람들을 위해서.

오늘 문변에게서 들은 부산의 실상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저에게조차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나이든 택시기사 아저씨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원색적인 전라도 혐오증 같은
정서적 문제에만 신경을 쓰던 저에게는
부산에서의 민주당 승리가 지닌 의미는 지극히 상징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변에게는 부산에서의 승리는
상징을 넘어선 것,
실제로 한나라당 일색의 구조 속에서 발붙일 곳 하나 없이 척박한 현실을 영위해가는 초라한 개혁세력에겐 생존의 최소조건을 마련해 주는 일이며
부산사람들을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실질적인 주인행세를 해온 한나라당과 그와 밀착한 토호들의 준동에서 해방시키는 일이고
그래서 져서는 안되는 싸움이었던 것이더군요.

십년이 넘는 기간동안 한나라당 일색이었다, 라는 말의 의미를
학교로 가는 차안에서 곰곰 되씹어 보았습니다.
갑자기, 87년 공간에서 기꺼이 생업을 버리고 운동에 뛰어든 몇몇 아는 얼굴들이 떠오르더군요.
그리고 문변의 말이 귀를 다시금 치더군요.

그 사람들이 한나라당에 가겠는가, 그렇다고 아무리해도 되지도 않는 민주당에 가겠는가. 결국 아직도 극빈의 생활을 감수하면서 시민단체 간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부산이 민주화의 성지라고 말은 하면서,
그 운동에 몸바친 사람들에게 해준 것이라고는 겨우 민주공원 하나 세워준 것이었다. 그 관장 자리 하나였다.

저는 물론, 운동이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청춘의 가장 빛나던 시기를 쫓겨다니고 얻어터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 떨면서 최전방에서 싸운 사람들이
그 빼어난 역량을 지역사회와 나라를 위해 사용하고 그를 통해 생업을 영위할 기회는
온 나라에 공평히 주어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기회가 한나라당에 모든 것을 몰아준 도시에서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버렸다는 것,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부산이 대한민국 안의 봉건적 섬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역감정이란 괴물은 반드시 무찔러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문변 자신은 결코 이 싸움의 적임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처음부터 자신은 할 수 없다고 했으며,
노짱은 그동안 온갖 경로로 무수한 사람들--조성래 변호사와 전 동아대 이총장을 포함하여 타진할 수 있는 어지간한 분들께는 거의 다 의사를 묻고 권유해 보았으며,
부산의 개혁적 인물들 가운데 이싸움을 흔쾌히 받아안겠다는 분이 없었다고 합니다.

************

저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제가 예수님의 열두 사도가운데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가롯유다가 아니라 도마 사도입니다.
다 알면서도 끝끝내 의심을 버리지 못해서 부활하신 예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야 믿었다는 그 도마 사도 말입니다.
너무나 나같은 인간이니까요.

문변을 찾아간 것은 내가 사랑하는 노무현이 처한 너무나 열악한 현실을
노짱 입으로가 아니라 문변의 입으로 말해달라는 요구였습니다.
결자해지라고, 문변이라는 대안을 두고도 YS를 의식해서 또는 쉽게 가려고 한이헌으로 결정한 것이 아님을 문변의 입으로 확인시키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노무현이 부산이라는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이 실상을
온나라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좁은 소견으로 그랬죠.

하지만 내가 이야기를 하고 들으며 깨달아 안 것은,
아니 부끄러웠던 것은,
노짱은 결코
부산사람들을 탓하는 말 같은 것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문재인으로 갔다면, 아마 우리 부산은 보다 영광스럽게 우리 자신을 이겼겠지요.
그러나 실패했을 땐 부산은 또다시 상처를 입습니다. 지역감정에 매몰된 어리석고 한심한 백성으로 전락합니다.
한이헌이라면, 혹시 실패해도 여러가지 이유가 부산의 어리석음을 보호하겟지요.
참 못난 사람입니다, 노무현. 농부가 텃밭을 탓하겠는가라고 했지요?

저는 부산 노사모 사람입니다. 부산의 위기가 어떤 성격인지를 잘 압니다.
그리서,
한이헌씨가 딱 한 가지만 보여준다면,
즉, 노무현에게로 합류하기 위하여
우리의 벗 광주가 결단코 용서할 수 없는 그의 국보위 출신이라는 경력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한다면,
우리노사모가 그를 도와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니, 모든 노무현 지지자들이,
이 사람과 부산을 도와서 반드시 "민주당표"가 부산에서 한 번은 이기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필사적으로 이 선거를 이기는 선거로 이끌고 가고 싶습니다.

저녁 내내 울었습니다. 주책맞게 학생들 앞에서까지 울었습니다.
제 안에 든 잘난 자존심과 싸우느라 울고,
이런 결정을 하기까지 그 새카맣게 타들어갔을 노짱때문에 울고,
부산의 몽매때문에 울고,
이 귀한 기회가 죽어버릴까봐 울고,
한없이 복잡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확인한 것은 있습니다.
저는 이 나라가 변하기를 원하고,
그 변화를 다른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노무현의 방법으로 하기를 원합니다.

이청준의 예언자라는 소설의 한대목이 생각납니다.
남쪽으로 가야하는 배가 있다.
그런데 그 배에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방향을 주장하며 노를 젓고 있어
제 방향으로갈 수가 없었다.
그럴 때, 통찰력있는 예언자가 남쪽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남쪽이라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북쪽이라고 말할 것이며,
그래서 배는 제자리에 있거나 남동쪽으로 가거나 할 것이므로.
그는 아마도 남쪽에서 좀 벗어난 곳,
반대자들의 주장과 상쇄되어 결국 남쪽으로 나아가게 할 지점을 가리킬 것이다.

저는 아마도 정말 광신도인 모양입니다.
노무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고 싶습니다.
제 속에 있는 시인의 직관과 영감이라는 화살이
그것이 옳다, 고 말합니다.

앞으로도 저는 아마 이번처럼 대소동을 자주 벌일 것 같습니다. 저는 의심하는 도마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제 의심이 언제나 제가 원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끝난다는 것을 알기에
안심하고 의심하려 합니다.

기쁘고, 슬픕니다.

(2002-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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