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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현상에 대한 정치학적 분석/손혁재
날짜 2002-12-02 조회 1174
* 필자 : 손혁재

노무현 현상에 대한 정치학적 분석 - 한국사회 지각변동, 노무현 현상 어떻게 볼 것인가


1. 머리말

노무현 바람의 실체는 무엇인가. 노무현 바람은 어디까지 불어갈 것인가. 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민주당 경선에서 불어닥친 노무현 바람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괜찮은 정치인‘으로서 ‘이인제 대세론’의 ‘다크호스‘ 정도로 인식되었던 노무현 후보가 경선을 통해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정치지도자‘로 부상되었기 때문이다. 이인제 고문의 압도적 우세라는 ’이인제 대세론‘에 맞서는 ’노무현 대안론‘의 위력은 민주당 안에서는 이인제 대세론을 꺾어버렸고, 밖으로는 ’이회창 대세론‘도 압도했다.

노무현 현상은 민주당의 재집권 가능성 정도로 좁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 여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급변하는 사회환경에 발맞추지 못하는 낙후된 한국정치의 발전가능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미 기존의 낡은 정치구도에 충격을 주었으므로 노무현 현상 그 자체만으로도 정치발전이 이뤄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올바른 사회발전의 계기가 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란 뜻으로 쓰인다. 해방 후 도입된 민주주의는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누구도 거부하지 못하는 당연한 역사적 추세였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주의는 순조롭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민주주의가 완성된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우리와는 다른 서양의 사회경제적 배경에서 자라난 민주주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고통이 따랐다.

특히 정치지도자들은 권력의 근거를 국민에게 두는 것에 흔쾌히 동의할 수 없었다. 국민의 뜻에 따른 권력행사에도 서툴렀다. 민주의식이 결여된 정치지도자들은 봉건적인 전제군주의 통치행태를 흉내내고자 했다. 권력행사는 초법적으로 하면서 의무는 소홀히 하고 책임은 전혀 지지 않는 일이 많았다. 다시 말하면 권력이 특정인과 동일시되는 권력의 인격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정치지도자들은 민주주의를 유지 발전시켜나가는 기본 원칙들을 예사로 어겼으며, 자신의 권력이 위기에 몰리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반칙을 일삼았다.

그러다 보니 대화와 타협이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무시하고 정치적 폭력이 일상적으로 나타났다. 정치사를 들여다보면 정치적 암살과 테러, 폭력적 헌법 유린, 쿠데타, 부정선거 등 고난과 격동으로 얼룩져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야만과 광기로부터 올바른 발전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것은 바로 1987년의 6월 항쟁이었다.

6월 항쟁 이후에도 한국 정치의 변화는 더딘 양상을 보였다. 사회 다른 분야의 변화와 발전에 비해 낡은 구도를 그대로 유지하거나 때로는 퇴행 양상까지 나타나는 ‘정치지체’가 일상화되었던 것이다. 이런 정치지체 현상을 깨려는 노력이 2000년 4.13 총선과정에서 나타난 낙천촵낙선운동이었다. 낙천낙선운동의 성과는 시민운동의 몫이 아니라 낙천낙선운동에 지지를 보낸 국민의 몫이다. 정치개혁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낙천촵낙선운동에 대한 지지로 나타났던 것이다.

낙천촵낙선운동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는 정치에 대해 실망하던 국민의 정치개혁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가 바로 노무현 현상으로 나타났다. 노무현 현상은 정치인 ‘노무현 개인’에 대한 단순한 기대라는 좁은 뜻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노무현의 ‘일관된 소신과 원칙의 정치’가 새로운 정치의 상징으로 국민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고스란히 노무현 지지로 옮겨갈 수 있지 않았을까. 특히 지역주의 극복과 언론개혁이라는 ‘현안에 대해 일관된 개혁’적 태도를 보인 것이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라는 권위주의 시절의 ‘거대 개혁’을 상징하는 김근태 의원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합리적 개혁세력을 끌어안을 수 있는 요인이었다. 또 소신을 바꾸지 않았던 것이 개혁적 이미지가 있지만 그 이미지에 어긋나는 정치행태를 보인 이인제 의원과 이회창 전 총재에게 실망한 세력을 모을 수 있는 요인이었다.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노무현 바람을 불러일으킨 정치적 요인은 크게 정치환경적 요인과 정치제도적 요인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치환경적 요인으로 정치개혁이 지지부진했고, 국민의 정치불신이 매우 크다는 점, 시민사회 안에 정치의 변화를 요구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적극적인 정치 행위까지 할 수 있는 합리적 개혁세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는 점, 야당의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가 여당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과 지역구도에만 기대고 있을 뿐 희망과 비전을 국민에게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 인터넷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전자민주주의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정치제도적 요인으로는 국민이 직접 대통령 후보 선출에 참여하도록 한 국민참여경선제를 도입했다고 하는 점을 꼽을 수 있다.

2. 부진한 개혁과 노무현에 대한 기대

노무현 현상의 가장 큰 원동력은 노무현 후보가 그 동안 보여준 정치적 행보가 시대정신인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는 점이다.

1) 김대중 정부 4년의 공과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을 탈당했다. 2001년 11월 당쇄신 파동의 와중에서 민주당 총재직을 물러났던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의 당적까지 포기한 것이다. 명분은 월드컵과 아시안 게임의 성공적 개최 등 국정 전념과 공정한 선거관리를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권력형 비리에 아들들이 관련되었다는 의혹이 김대중 대통령을 민주당 밖으로 내몰았다.

아직도 임기가 적지 않게 남아있지만 김대중 정부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다. 취임 초 한 1년 정도 국민의 지지가 높았을 뿐 어느 사이엔가 임기말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쓰일 정도가 되었다. 국민의 정부가 위기 상황으로 몰린 것은 개혁의 성과에 대해 실망한 국민의 지지가 떠나갔기 때문이다. IMF 관리체제라는 위기 상황에서 헌정사상 첫 여야간 정권교체로 출범한 국민의 정부에 대해 국민이 거는 기대는 높았다. 김대중 대통령도 많은 약속과 다짐을 했다. 5.16 쿠데타와 유신의 핵심이었던 보수세력과의 연합으로 출범한 소수 정권이라는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김대중 정부의 개혁에 대한 기대와 신뢰는 비교적 높았다. 초기에는 일정한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긍정적 평가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IMF를 초래한 김영삼 정부 때보다 더 민심이 악화되었다. 그 원인은 ‘신뢰의 상실’과 ‘서툰 국정운영’이었다. 신뢰를 잃게 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현대건설 문제이다. 현대 문제 처리 과정을 지켜보면서 시장도 국민도 정부의 재벌개혁 의지나 정책을 신뢰할 수 없었다. 더구나 기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실업자에 대한 배려도 부족했다. 여기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권력형 비리 의혹이 계속 제기되었고, 마침내 대통령의 아들들이 각종 게이트에 연루되었음이 밝혀지면서 김대중 정부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다.

낙천촵낙선운동이 거셌음에도 여전히 바뀌지 않는 정치를 보고 정치불신이 심화되었다. 의약분업 과정에서 나타난 정부의 준비부족과 의사들의 폐업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정부의 무능력과 집단이기주의에 신물이 났다. 잇달아 터져 나오는 금융비리들은 현 정부도 부패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하다는 의혹을 느끼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정치권과 언론에서 지역감정의 잣대를 들이대는 바람에 극심해진 지역주의 또한 사회를 갈가리 찢어놓았다. 게다가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야당과 해당언론이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극단적인 대립이 이뤄졌다.

무엇보다도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것은 낡고 썩은 정치이다. 정치는 사회의 여러 갈등과 대립을 가장 높은 차원에서 푸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갈등을 풀기는커녕 오히려 자꾸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내고, 문제를 더욱 꼬이게 하는 ‘애물단지’였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고장난 불량정치가 더욱 문제인 것은 정치논리가 경제를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IMF는 단순한 경제의 실패가 아니라 국정운영의 총체적 실패이다. 그 실패의 뿌리에는 정경유착으로 만연된 부정부패가 자리잡고 있다. IMF 위기를 겪었으면서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린 정치가 불신을 심화시키면서 계속 경제의 발목을 잡아온 것이다.

물론 정치개혁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성과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인사청문회를 도입해 국무총리와 헌법재판관, 대법관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실시했다. 그러나 청문회 대상이 국회의 인준을 받거나 추천을 받도록 헌법에 규정된 경우로만 한정되었다. 국무위원과 장관급 공직자, 그리고 권력기관인 국정원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국세청장, 방송위원장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제외되었다.
검찰과 경찰의 민주화와 정치적 중립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전 법조비리, 옷 로비 사건, 파업유도 사건 등 굵직한 검찰개혁의 계기가 주어졌음에도 검찰개혁은 추진되지 않았다. 이용호 게이트를 비롯한 각종 권력형 비리는 검찰개혁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편파적이고 음모적인 검찰권 행사로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야당 시절 검찰 중립화를 강하게 주장했던 김대중 대통령이지만 집권 이후 검찰 중립화 주장이 약화되었다. 검찰의 기득권과 타협하고 검찰을 정치의 시녀로 이용하려 했던 것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지방자치제도의 개선도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는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문제를 부각시켜 기초자치단체의 부단체장을 중앙정부가 임명하겠다는 비민주적 정책을 추진하다 여론의 반대에 부닥쳐 포기했다. 일부 여야 의원들은 기초자치단체장을 임명제로 하자는 안을 국회에 제출해놓은 상황이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사이에 권한과 기능의 재분배를 위해 대통령 직속으로 기능이양위원회를 만들었지만 논의가 진행중일 뿐이다.

부패방지법과 자금세탁방지법도 제정되었지만 특별검사제, 떡값 처리 기준(공직자 윤리규정), 내부고발자(공익제보자, whistle-blower) 신변보장 수단 같은 핵심은 빠져버리고 말았다. 부패방지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종이호랑이’ 신세가 돼버리고 만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개혁성을 적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국가인권위원회는 설치되었지만 법무부와 검찰의 조직이기주의와 힘에 밀려 당초 인권단체와 시민단체의 요구에서 한참 못 미친 수준에서 설치되었다.
2000년 2월에 국회 의석 26석을 줄이는 등 선거법, 정당법, 국회법, 정치자금법과 같은 정치법이 일부 개정되었다.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정치개혁이 완수된 것은 아니다. 개혁과 국정운영의 힘있는 추진을 위해서 해결해야 할 본질적인 정치개혁 과제가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준법서약서를 없애고 양심수를 전면 석방하는 일, 국가보안법을 고치고 조작간첩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일, 국가정보원의 정치개입을 철저하게 막는 일 등이 선거법, 정당법, 국회법, 정치자금법의 개정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개혁과제이다.

정치 개혁은 제도의 개선은 물론이고 정치권의 개편, 정치 문화의 변화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은 정치 개혁을 정당, 선거, 의회 제도의 개선 정도로 좁게 보고 있으며, 그나마 제도의 개선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지 못한 것이다. 현행의 비례대표 배분방식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판결을 내림으로써 정당명부제 도입이 논의되다가 중단된 상태이다. 전교조와 민주노총의 합법화, 노조의 정치활동 허용 등도 정치개혁의 성과가 아니라 노사정 대타협에 따라 노동자들이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정리해고제를 받아들인 데 대한 반대급부일 뿐이다. 그것도 노동계가 총파업과 노사정 위원회 탈퇴 등의 싸움 끝에 겨우 획득한 성과이다. 의문사의 진상을 밝히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며, 보상을 해 주는 일도 피해자 가족들의 1년이 넘는 국회 앞 천막농성으로 겨우 얻어냈다.

2) 정치개혁 실패 요인

정치가 여전히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어도 국정운영방식이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등의 불인 외환위기 극복에 총력을 기울여야만 했고, 뿌리가 다른 자민련과의 연대를 통해 겨우 집권한 권력기반이 취약한 소수파 정부로서 보수기득권세력과의 전면 대결을 회피했다. 또 권위주의 정권과의 투쟁에 힘썼던 국민의 정부 주도세력이 국정운영 경험이 별로 없었다는 것도 약점이었다.

둘째, 개혁과 국정운영이 제도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동정부를 이루고 있는 국민회의와 자민련, 청와대, 장관을 비롯한 행정부가 개혁과 국정운영에서 담당한 역할은 미흡했다. 거대야당의 반대로 곳곳에서 개혁이 무산되자 ‘수의 논리’에 집착한 여당은 ‘여소야대’를 ‘여대야소’로 만들었다. 그러나 여대야소도 개혁과 국정운영의 제도화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개혁과 국정운영이 난맥상을 보이는 원인은 무책임한 정치권과 무사안일한 고위공직자들의 복지부동에 있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사라져야 할 낡은 관행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실수가 잇달아 일어났고, 이것을 바르게 수습하지 못해 벼랑 끝으로 밀린 것이다. 물론 보수 기득권 세력의 힘이 대단히 컸고, 내각제 문제 때문에 공동여당이 벌인 신경전으로 개혁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바로 이 같은 것들이 대통령선거에서 평가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대안세력으로서의 야당이 제 구실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내 과반수에 육박하는 거대야당은 현 정부의 개혁을 추동하거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야당 본연의 자세를 갖추지 못했다. 거의 사보타지에 가까울 정도로 정부의 발목을 잡았을 뿐 국민에게 차기의 비전과 희망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더구나 김대중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 이후 민주당이 당쇄신 노력을 기울여 나가는 동안에 당내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비주류의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당의 시대적 낙후성이 민주당과 대비해 확연히 드러났다.

3) 노무현의 정치 역정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낡고 썩은 정치에 실망하고 좌절했던 국민이 새로운 기대를 노무현 후보에게 걸어볼 수 있게 된 것은 노무현의 일관된 정치 역정때문이었다. 원칙과 소신을 지키면서 지역갈등 등 한국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해 어렵게 피해가지 않고 기꺼이 맞섰다는 이미지가 노무현 의원을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민권변호사이던 노무현 후보의 정치입문은 1988년 4월 26일에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영삼 총재가 이끌던 통일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당선되면서 이루어졌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의 정치입문은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 김영삼 총재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 지역에서 민주당의 공천을 받았으니 당선이 그리 신기할 것도 없었다.

노무현 후보의 득표율은 51.0%였으며 민정당 허삼수 후보의 득표율은 42.3%였다. 51.0%는 통일민주당의 부산시 평균득표율인 54.3%에 비해 3.3% 낮은 것이었다. 신군부의 핵심으로서 전두환 정부의 실세였던 ‘3허’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허삼수이기에 상대적으로 힘겨운 선거를 치렀던 것이다. 게다가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 않은 노무현 후보 개인의 지지기반이 정계입문 당시에는 별로 없기도 했다.

노무현 의원의 존재와 가치를 국민들에게 알린 첫 계기는 바로 청문회였다. 노무현 의원에 대한 국민의 이미지는 ‘청문회 스타’이다. 정치입문 6개월만인 88년 11월 7일부터 사흘 동안 열린 국회 5공특위의 일해재단 청문회가 노무현 의원의 ‘스타 탄생’을 알린 자리였다. 청문회는 증인들로부터 증언을 듣는 자리이다. 그러나 청문회를 처음 실시하는 데다 주제가 5공 비리라든가 광주 학살의 문제이다 보니 의원들이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마치 증인들을 죄인처럼 다그치거나 몰아 부치기 일쑤였다. 소리를 크게 지르거나 증인들을 호되게 질책하는 다른 의원들과 달리 노무현은 증인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증인들을 심문했다. 이종원 전 법무장관, 장세동 전 안기부장, 정주영 현대그룹 사장 등을 상대로 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은 청문회를 지켜보던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노무현 의원이 청문회 스타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를 계기로 부산 지역의 이름 없는 정치신인 노무현 의원은 전국적인 대중정치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청문회가 노무현 의원의 능력을 알린 계기였다면 노무현 의원의 소신을 국민에게 알린 계기는 3당합당이었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통합을 선언했다. 노무현 의원은 이철, 김정길 등과 함께 3당 합당을 비판하고 민자당 합류를 거부했다. 이들은 무소속 의원들과 함께 1990년 6월 15일 이기택을 총재로 민주당을 창당했다. 노무현 의원의 정치적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그 뒤 노무현 의원이 민주당의 대변인이 되었는데, 이 시절 노무현 의원은 조선일보와 맞대결을 벌였다. 조선일보가 노무현 의원에 대해 악의적인 왜곡보도를 했기 때문이다. 주간조선 1991년 10월 6일자에 “통합 야당 대변인 노무현 과연 ‘상당한 재산가’인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는 실린 터무니없는 내용에 대해 노무현 의원은 명예훼손이라면서 조선일보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걸었다. 당연하고 또 정당한 조치였지만 정가에서는 ‘순진한 초선의원의 언론에 대한 철없는 도전’ 정도로 받아들였다. 재판결과 노무현 의원이 이겼다. 그러나 판결이 나오기 8개월 전에 치러진 1992년 3월 24일의 제14대 총선거에서 노무현 의원은 낙선하고 말았다. 거대족벌언론에게 대들었다가 정치적 패배를 당했지만 노무현 의원의 소신이 다시 확인된 계기였다.

일관된 소신을 굽히지 않은 노무현 의원은 계속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3.24 총선에서 부산은 김영삼 대표에게 등을 돌린 노무현 의원에게 ‘김영삼의 힘’을 보여주었다. 13대 총선 때 허삼수가 반란을 일으킨 군인이므로 국회로 보내지 말고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김영삼 민자당 대표는 허삼수가 충직한 군인이므로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라도 국회의원으로 뽑아달라고 외쳤던 것이다. 노무현 의원은 32.3%의 득표율로 63.6%를 얻은 허삼수 후보에게 지고 말았다. 노무현 후보의 득표율은 민주당의 부산 평균 득표율인 20.7%에 비해 11.6%나 높은 것이다. 허삼수 후보의 절반 정도밖에 표를 얻지 못했지만 이는 바로 지역정서 때문이었다. 당선은 못했지만 노무현 후보가 일정한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떨어진 김대중 민주당 후보는 정계를 은퇴했다. 김대중이 은퇴한 뒤 지도부를 재구성하면서 노무현 후보는 민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원외이다 보니 활동이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노무현 최고위원의 대중적 인지도는 꾸준히 상승한다. 예컨대 1993년 7월 21일자에 한국일보에 실린 여론조사에서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한잔하고 싶은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친근한 서민적 이미지의 대중정치인임이 다시 한 번 확인된 셈이다.

새로운 시대가 지방화의 시대가 될 것임을 내다본 노무현 의원은 1995년 6월 27일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또다시 낙선되고 말았다. 여론조사에서는 단 한번도 1위를 내주지 않았지만 선거결과는 달랐다. 6.27 지방선거에서 고질적인 지역감정을 뿌리로 한 지역분할 구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노무현 후보가 지역구도에 정면으로 맞서서 극복하고자 힘을 기울이게 된 계기가 바로 6.27 지방선거였다. 노무현 후보는 부산시장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92년 대선 득표율(12.5%)의 3배가 넘는 37.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민자당 문정수 후보의 득표율은 51.4%였다. 부산 지역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어떤 경우에도 고정적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노무현 후보의 정치적 시련은 이어졌다.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의 정계복귀로 야당이 분열되자 노무현 후보는 국민회의 합류를 거부하고 민주당에 남았다. 그리고 1996년 4월 11일 제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 출마했다가 17,330표(득표율 17.7%)를 얻어 9명의 후보 가운데 3위를 차지하는데 그쳤다. 또 민주당도 약화되었다. 노무현 후보는 김대중의 정계복귀와 민주당 분당에 반대한 김원기, 김원웅 등과 함께 야권 통합을 위한 노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그 노력은 11월 9일 국민통합추진회의의 발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3김씨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적 권위에 밀려 통추는 국민화합이나 야권 통합에 그다지 기여를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3김시대의 종식과 세대교체를 주장했던 통추가 분열되었다. 정권교체를 위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논의하는 과정에서 통추의 분위기가 이인제 경기도 지사 지지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을까 우려한 노무현은 대통령 출마설을 거론하며 이인제 지사와의 ‘세대교체 논쟁’을 제기했다. 결국 통추의 일부는 한나라당 합류와 이회창 지지, 다른 일부는 민주당 입당과 정권교체 기여로 갈라졌다. 노무현은 97년 11월에 김정길 김원기 등과 함께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뒤에 노무현 후보는 다시 국회에 진출했다. 이명박 의원의 의원직 상실로 다시 치러진 서울 종로구 재선거에서 당선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정치의 가장 큰 문제를 지역주의로 파악한 노무현은 지역주의를 정면돌파하기 위해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구를 포기하고 국민회의가 취약한 부산을 선택했다.

2000년 4월 13일에 치러진 제16대 총선은 노무현 의원에게 좌절과 기회를 한꺼번에 안겨주었다. 노무현 의원은 현역으로 당선가능성이 높은 종로구를 포기하고 지역구도의 극복이라는 소신에 따라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으로 지역구를 옮겼던 것이다. 지역감정의 벽을 허물겠다던 노무현 의원의 도전은 또다시 실패했다. 여론조사에서 줄곧 한나라당의 허태열 후보, 민국당의 문정수 후보를 앞서갔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선거를 20일 정도 앞둔 3월 23일까지 노무현 후보는 여러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의 허태열 후보를 크게는 16.7%, 적게는 1.6%까지 앞섰다. 선거 전날 하루까지도 8% 안팎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선거결과는 정반대였다. 노무현 후보는 2만 7136표(35.7%)를 얻어 4만464표(53.2%)의 허태열 후보에게 지고 말았다. 노무현 후보의 득표율 35.7%는 민주당의 부산 평균득표율 15.1%의 두 배가 넘는 것이다. 확고한 노무현지지 세력의 존재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노무현 후보는 극단적인 지역주의가 판을 치고 반김대중 정서가 강하게 작용한 선거 풍토를 탓하지 않고 패배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였다. 노무현 후보의 정치실험을 눈여겨보던 네티즌들이 노무현 후보의 낙선에 대해 안타까움과 울분을 표시하며 격려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라는 열성적 지지자 조직까지 만들어졌다.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자발적인 유권자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또 이를 계기로 지역적 지도자에서 전국적 지도자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마침내 지금은 경선을 통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됨으로써 새로운 도전의 출사표를 던졌다.

4) 노무현 현상의 등장

노무현 바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다. 2000년 4.13 총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낙선된 뒤 결성된 노사모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정치인 팬클럽으로 2만 명이 넘는 적극적 지지자로 구성된 자발적 조직이다. 다른 후보들도 자발적인 지지자들이 있지만 노사모처럼 적극적이지는 않다. 평소에는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하는 노사모는 경선이 열리는 곳마다 자발적으로 모여서 노무현을 위한 활동을 열심히 벌이고 있다. 다른 후보의 운동원들이 대부분 조직적으로 동원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노사모에 대해 다른 후보측에서 문제를 제기했지만 아직까지 노사모의 활동이 물의를 일으킨 것은 없다. 오히려 유권자들의 자발적인 정치참여의 한 형태로서 노사모는 모범적인 사례로 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정치를 불신하고 외면했던 유권자들이 ‘좋은 정치인’을 도와주고 격려하며, 나아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지 않도록 견인하도록 권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선거문화가 노사모와 같은 움직임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노사모에 대한 입장은 당내 경선에서는 상관이 없지만 대선 때는 활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일반 유권자를 상대로 특정 후보자를 위한 활동을 하는 사조직을 선거법이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선거에서는 사조직이 선거운동원으로 설정되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득표 효력 면에서 가장 효과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유권자들이 후보의 정책이나 정당을 기준으로 투표하기보다는 개인적 연고 중심으로 투표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보들은 공조직 이외에 개인적 연고를 기반으로 하는 각종 사조직을 구축하여 선거운동에 활용한다.
원칙적으로 공식적인 선거운동기간을 정해놓고, 이에 따라 사전선거운동을 규제하는 우리 선거법의 입법 취지는 선거운동이 혼탁하게 전개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선거법에 ‘해도 좋다’는 허용 규정보다 ‘해서는 안 된다’는 제한 규정이 더 많은 것이다. 사조직도 규제 사항 가운데 하나이다.

사조직에는 선거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나 조직을 선거운동에 활용하는 종친회, 동창회, 향우회와 각종 친목회 등이 있고, 선거를 목적으로 후보나 정당에서 만든 비공식적 조직이 있다. 사조직을 규제하는 까닭은 사조직이 혼탁선거의 주범이 될 가능성 때문이다. 사조직이 선거법을 잘 지키지 않고, 법정선거비용 이외의 돈(그러니까 불법정치자금이 된다)을 쓰는 통로가 되곤 했다.

노사모는 종래의 사조직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조직은 후보나 후보 측근이 만든다. 이와 달리 노사모는 노무현 지지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었다. 일반 사조직 운영경비는 후보나 후보 측근이 부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비해 노사모는 구성원 스스로 경비를 분담해서 움직여 나간다.
일단 노사모는 선거법의 관점에서 보면 사조직에 해당된다. 노사모의 선거운동을 인정할 경우 다른 후보측에서 노사모 형태의 사조직이 만들어질 가능성 또한 높다. 따라서 선관위로서야 일괄적으로 규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권자인 국민이 능동적으로 정치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한 현상을 생각할 때 현실과 법제도의 괴리를 메우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

3. 국민경선제의 도입과 노무현 현상

노무현 현상이 나타난 가장 중요한 배경은 국민참여경선제의 도입이다. 정당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대통령 후보 선출에 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참여하도록 한 획기적 제도인 국민참여경선제가 노무현 바람의 진원지였다. 노무현 후보가 개혁의 적임자라는 인식이 국민 사이에 확산된 계기가 바로 국민참여경선제였다. 민주당 내에 지지기반과 조직이 없는 노무현 후보는 예전처럼 전당대회를 통해 대의원들만으로 경선을 치렀다면 후보가 되기가 어?活?것이다.

국민참여경선제는 민주당의 당 쇄신 과정에서 도입되었다. 10.25 재보궐선거의 참패를 둘러싼 민주당의 격렬한 논란의 와중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의 당 총재직에서 전격적으로 물러났다. 민주당의 상징이었던 김대중 총재의 당 총재직 사퇴로 민주당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자생정당으로 다시 태어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민주당은 쇄신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당내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는 여러 제도들을 도입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국민참여경선제이다. 압도적 카리스마가 사라짐으로써 생긴 당권의 공백을 메우면서 당의 존립을 보장하고,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 채택한 제도이다.

국민참여경선제는 김대중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로 창당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은 민주당을 살려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정치까지 살려냈다. 정치의 객체로만 존재했던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통로를 열었더니 뜻밖에도 국민참여가 처음 예상보다 많았다. 정치가 제 구실만 한다면 국민의 정치참여가 얼마든지 활성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나아가 국민이 새로운 정치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도 보여주었다. 국민경선제는 특정한 지역에 압도적인 지지기반을 갖고 있는 카리스마적 1인 보스를 중심으로 한 ‘패거리 정치’를 뛰어넘기가 결코 불가능하지 않음도 확인시켰다.

1) 국민경선제의 도입과 의의

국민참여경선제는 일반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획기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기 위해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에 국민을 참여시킨 제도이다. 미국에서 시행하는 예비선거(preliminary election)와 비슷한 성격의 제도이다.
민주당의 쇄신안에는 총재직 폐지와 집단지도체제 도입, 당총재와 대통령 후보의 분리, 상향식 공천과 같은 획기적인 당내 민주화 방안들도 있다. 그렇지만 역시 쇄신의 핵심은 국민참여경선제였다. 국민참여경선제는 우리 정치의 근본적 문제점 가운데 하나인 1인 보스 중심의 사당적 구조를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안이기 때문이다. 정당의 가장 크고 중요한 행사에 국민이 직접 참여하게 함으로써 정당과 국민이 만날 수 있는 길을 냈다고 하는 것은 정치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민주당 국민참여경선의 선거인단 규모는 7만 명이다. 7만 명은 선거인단은 대의원과 일반당원, 그리고 일반국민이 각각 2 : 3 : 5의 비율로 배정되었다. 대의원 1만4천명은 종전의 전당대회 대의원 숫자와 같은 규모이다. 그리고 일반 당원은 2만1천명이었다. 그리고 일반국민이 3만 5천명이었다.

대의원은 선발 과정에 지구당위원장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이다. 당원 가운데에서 선거인단을 어떤 방식으로 선출하는가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지구당위원장의 영향력이 매우 강하다. 지금까지는 전당대회에서 대의원만으로 대통령후보를 선출했다. 지구당위원장의 선호에 따라 대의원들은 거수기 노릇만 한 셈이다. 후보들은 지구당 위원장을 자신의 지지자로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경선이 혼탁해졌다. 민주당 경선에서도 낡은 정치관행이 여전히 나타났으나 다행히 표결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았다.
50%를 차지한 일반 국민들은 지구당위원장의 영향력 범위 안에 들어있지 않다. 선거인단이 되고자 하는 국민들은 입당원서를 내고 소정의 당비를 제출하는 등 입당 절차를 밟고 선거인단에 등록한 뒤 인구 비례에 따라 배정된 권역별 선거인단의 수에 맞춰 무작위 추첨을 통해서 선거인단으로 확정되었다. 더구나 3만 5천명 모집에 모두 190여만명이 지원을 했다. 따라서 후보들이 자신의 지지자를 대폭 동원시켜 선거인단의 다수를 차지하기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좋은 대통령을 뽑으려면 후보의 검증과 선출과정이 엄정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져도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 국민은 각 정당이 내세우는 후보 가운데서 대통령을 선출한다. 따라서 정당이 대통령 후보를 잘못 내세우면 선거결과도 잘못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후보 선출은 많은 당원이 직접 참여하거나 의견을 밝힐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일반 당원이나 유권자의 의사와 동떨어진 후보가 선출된다면 그 후보는 일반유권자는 물론 당원의 지지조차 받지 못해서 선거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민참여경선은 후보 선출과정을 통해서 당원의 정체성(identification)을 높였고 유권자의 관심을 끌어 이를 정당지지로 연결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실제로 민주당은 경선을 치르면서 정당지지도가 높아져 2년 만에 한나라당을 앞지르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경선 과정 자체가 지지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이 된 것이다.

국민참여경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문제점이 나타났다. 그러나 만 명 안팎의 대의원들을 전당대회에 참여시켜 치렀던 지금까지의 경선도 크고 작은 문제점이 나타나곤 했다. 처음 도입되는 국민참여경선에서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지도 모른다. “몇 가지 불미스런 일을 놓고 경선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점들이 나타났다면 시급히 보완책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2002.3.8 한겨레 사설 ‘제주 경선에 쏠리는 관심’). 문제점이 드러나면 그것을 부풀려서 제도의 의의를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부작용을 최소화시키고, 보다 나은 경선이 될 수 있도록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예비경선제의 본 고장인 미국도 이 제도가 정착되기까지는 60년 이상이 걸렸다. 1912년에 민주당에서 도입된 예비경선제는 1972년에야 제 자리를 찾았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공화당에서 예비경선제가 뿌리를 내린 것은 그보다 더 늦은 1984년이었다.

새로운 정치실험으로 조심스럽게 시작한 국민경선은 불과 두 달 사이에 확실한 정치제도로 자리잡았다. 민주당이 처음에 경선제를 도입했을 때 예상되는 문제점을 지적해가며 비판하던 야당도 경선을 통해 대통령 후보를 선출한다. 6월 13일에 치러질 각급 지방선거의 후보들도 다양한 형태의 경선을 통해 선출되고 있다.

먼저 경선은 국민의 정치관심과 참여를 유발했다. 민주당 경선을 많은 국민이 주말연속극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민주당 경선이 한편의 각본 없는 정치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경선을 통해서 민주당이 얻어낸 가장 중요한 성과는 ‘경쟁력 있는 후보’의 등장이다. 각종 여론조사는 노무현 후보에 대한 국민 지지가 이 전 총재를 압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나라당 경선이 국민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것은 ‘이회창 독주’가 극적인 재미를 반감시키고 ‘하나마나한 경선’이라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적어도 민주당 당원과 지지자들)의 정치의식 수준이 낮지 않음을 확인한 것도 경선이 얻어낸 또 하나의 성과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정치를 움직였던 돈, 지역감정, 색깔론 등 비합리적인 요소들과 음모론 등 무책임한 선동에 선거인단이 휩쓸리지 않았던 것이다. 또 각종 언론매체들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일반 국민들도 지역감정이나 색깔론에 쉽게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어쨌든 정치개혁을 열망하던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줌으로써 노무현 바람을 가능하게 하였다. 50%를 민주당의 기간 조직과 무관한 일반 시민(실제로는 민주당의 지지자일)들이 차지함으로써 민주당 안의 ‘대세’나 조직이 부분적인 효과밖에 갖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민주당 조직의 100%를 장악해도 전체 선거인단의 50%밖에 안 되므로 나머지 50%의 향방에 따라 결과가 결정되는 것이다. 돈과 조직으로 치루던 기존의 선거 패러다임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후보의 품성, 자질, 능력, 도덕성 등이 중요한 요소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의 경선과정에서 정책대결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음모론, 색깔론 등을 통해 후보들 사이의 차별성이 드러난 셈이다. 공격을 받은 노무현 후보의 배후나 성향 등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공세를 한 이인제 후보의 성향 등이 문제가 된 것이다.

4. 맺음말

새 천년의 한국 정치는 유권자의 반란으로 문을 열었다. 세기말의 정치는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IMF 사태를 맞으면서 낡고 썩은 정치의 틀을 새로운 정치의 틀로 바꾸어야 한다는 정치 개혁이 한국 정치의 가장 커다란 화두로 떠올랐다. 그러나 국민의 정서와 기대, 언론의 비판과 지적, 정치권의 반성과 다짐과는 달리 유감스럽게도 정치개혁의 성과는 단 하나도 없었다. 새롭게 태어나기는커녕 낡은 정치의 추악한 모습만 되풀이해서 보여주었다. 국회는 내내 헛돌았고 여야는 사사건건 팽팽하게 맞서기만 했다. 6.4 지방선거를 비롯해서 몇 차례의 재보궐 선거에서는 지역감정과 흑색선전이 기승을 부렸다. 국민의 정치 불신이 높았던 터에 정치가 제 구실을 못하자 국민소환제 주장이 나오고 국회의원들을 고발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정치불신은 냉소주의나 무관심에 머물지 않고 정치에 대해 경멸하고 환멸을 느끼는 상황이 되었다. 마침내 국민이 정치를 증오하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낙천낙선운동은 바로 이처럼 폭발 직전에 있던 민심에 불길을 당겼다. 밑으로부터 일어난 참여민주주의 열기는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에 대해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강도로 높은 지지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총선시민연대가 국민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 여론에 총선연대가 떠밀려가는 양상가지 나타났던 것이다.

국민이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에 지지를 보냈던 이유는 낡은 정치를 더 이상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 썩고 낡은 정치라는 데 이의를 다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멋대로 굴러가는 정치에 대해 더 이상 참지 못한 국민의 행동이 낙선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공천반대운동과 낙선운동은 ‘고장난 정치’로 인한 피해를 줄이려는 유권자들의 정당한 자구 노력이었던 셈이다. 노무현 현상도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낙천낙선운동으로도 바뀌지 않은 정치변화의 가능성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나라 헌법 제1장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국민주권의 원칙을 밝혀놓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라 할 수 있는 주권재민의 원리가 현실적인 제도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선거제도이고 선거법이다. 민주주의의 존립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선거에 달려 있고 선거와 관련되어 정치적 법률적 문제가 제기된다.

또 헌법은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제24조)”고 규정하고 있다. 선거권이 국민의 기본적 권리임을 명시한 것이다. 민주정치는 선거에 의한 정치이다. 민주정치는 국민의 자치, 즉 국민의 참여에 의한 정치이므로 정치참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좋은 방법을 계속 진지하게 찾아보아야 한다. 국민참여경선제가 많은 국민에게 정치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도록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국민참여의 통로를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를 바라보는 국민과 언론의 관점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국민과 언론의 관심은 단 하나 “누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것인가”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것이다. 선거는 후보자들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벌이는 흥미진진한 한판싸움이 아니다. 선거는 주권자인 국민이 신성한 주권행사를 통해서 국민의 대표를 뽑는 절차인 것이다. 따라서 대선을 바라보는 유권자의 관심은 “누가 이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좋은 대통령을 뽑을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더구나 차기 대통령은 87년 6월 항쟁 이후 진행된 민주화의 연장선상에서 문민정부에 이은 국민의 정부가 이룩한 ‘공’과 ‘과’를 이어받아 21세기 한국의 발전을 이끌어갈 책무를 안게 된다. 따라서 16대 대선의 초점은 헌정사상 첫 평화적 정권교체의 정치적 역사적 의미와 IMF 국난 극복의 의미, 국민의 정부가 추진한 개혁에 대한 평가가 되어야 한다.

노무현 현상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생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의 출현에 대한 기대가 노무현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여야는 노무현 현상이 갖고 있는 이 같은 의미를 제대로 인식해서 정치개혁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정치의 총체적 부실의 책임과 원인이 정치에 대해 항시적이고 지속적인 견제와 감시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했던 유권자에게도 있다. 민주주의의 처음과 끝을 완성하고 책임지는 주체는 유권자이다. 3류의 정치는 3류의 주권행사가 빚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선거를 통해서 정치인이 아닌 국민이 정치발전과 사회개혁에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정치인들이 정신을 차릴 것이다. 또 선거를 통해서 국민이 정치를 통제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정치인들이 국민의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고 국민의 눈치를 살펴 애쓰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유권자들은 책임도 권리도 의무도 없는 방관자의식을 버려야 한다. 민주주의 나라에서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국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민이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올바르고 당당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시민단체들이 2002년 양대 선거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이고, 또 직접 간접적으로 일정한 역할을 맡아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 필자는 현재 참여연대 운영위원장입니다.

(2002-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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