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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 > 웹진 > 네티즌 칼럼 > 임흥재의 세상구경 > 대자보 세상


임흥재의 세상구경의 대자보 세상
2002 대선, 두 개의 '보이지 않는 손'
음모의 마수(魔手)와 열망의 손사위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은 두 여중생의 죽음과 미군 병사의 무죄판결에 분노한 우리들의 촛불시위를 보면서, 나는 그 꽃다운 목숨이 피떡이 된 주검으로 나와 만나던 날, 얼마 후 서해에서 열혈의 청년들이 북경비정의 함포에 산화해갔던 날을 떠올렸다. 그 때에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늘 다시 그 두 개의 죽임과 만난다. 우리의 땅에서 저질러진 이방인의 죽임과 이방으로 갈라진 같은 민족에 의한 죽임이 그것이다. 이것은 곧 우리의 불행한 역사이며 슬픈 우리의 현실이다.

내 땅에 점령군으로 들어와 이제는 주둔군이 되어있는 미군과 이 땅을 해방하겠다며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눔으로해서 그 미군이 주둔하도록 만든 이북의 군대, 그 사이에 낑기어 있는 우리의 군대. 이 세 집단의 역학관계와 긴장의 이완과 수축에 의해 부대끼고 고통받는 우리의 세상, 거기에서 살아내야 하는 우리들의 삶. 불과 얼마 전의 시절까지 우리들은 그 속에서 저질러지는 많은 비인간적인 폭력과 살상에 대하여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고 설령 용기있는 목소리가 들렸다한들 그 소리는 이내 잦아들고 말았다. 누군가가 그 인간의 함성을 소리내지 못하도록 틀어 막았다.



다행히, 정말 다행히 우리는 그 공포와 강박의 울타리를 벗어나 조금씩 비록 작은 목소리로 우리들의 삶을,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삶 속에서의 자존심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하였다. 아주 작지만 그러나 소중한 삶의 원칙, ‘나를 강제하는 것이 나의 의사에 반한 폭력이어서는 안된다’고 우리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여 기도하며 ‘다시는 불의한 폭력에 숨죽이며 절망하며 살지 말자’고 서로를 위로하였다. 인간으로서 반드시 지켜야할 인류애의 실천과 그것을 훼손한 미국의 오만한 폭거를 질타한 것이다. 그것 뿐이다. 반미인가? 아니다. 반인간 비인류에 대한 인간다움의 선언일 뿐이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과실치사의 행위도 그 행위의 실행자인 미군병사도 아니다. 또한 이미 죽은 우리의 딸들을 살려내라는 요구는 더욱 아니다. 우리는 다만 이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비극이 이 땅에서 다시는 저질러져서는 안된다고 요구하는 것이고 주둔의 필요성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궤도차량으로 우리의 자존심까지 짓뭉개며 지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오만한 제국의 폭력이 일방의 논리로 정당화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반미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신들의 과오에 대하여 미국의 정부가 솔직히 사과하기를 바랬고 호혜적이지 않은 불평등한 소파(SOFA)의 개정을 호혜의 원칙에 입각하여 개정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들의 자발적이고 성결한 이 요구가 남도 아닌 국회다수당의 대표의 입을 통해 ‘보이지 않는 손’의 음모로 매도 당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어떻게 오만한 미국이 우리의 성심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막막함에 소름이 끼친다. 일방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인 이 현실에 분노하여 혈서를 쓰고만 초등학생들의 동심까지 음모로 왜곡선동하는 실성한 정상배를 보면서 나는 그런 인사를 다선의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준 이 세상에 환멸한다. 그 당의 후보는 “떠나달라”는 시위미사의 현장에서 두꺼운 표정으로 부끄러움을 견디고 그 당의 대표는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들의 몸부림을 음험한 인형극으로 몰아 세우는 이 나라. 12월 19일, 우리의 선택이 왜 중요한 것인가는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음모의 마수-서청원의 ‘보이지 않는 손’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을 말한 것은 수요와 공급의 균형점에서 가격이 결정되는 공정시장의 원리를 설명하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얘기다. 이 고전주의 경제학의 원리도 사실 완전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공정한 시장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면 하나의 경제학적인 이론에 그치고 만다. 실제로 시장에서의 완전한 공정경쟁이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 시장에서의 가격결정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생산기술과 자본을 독점한 메이저 공급자의 일방적 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우리가 쓰고 있는 컴퓨터 운영체제인 윈도 프로그램이 시장의 가격결정기능에 의하여 형성 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독과점적인 위치에 있는 상품의 예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이와 비근한 예는 상당하다.

이 글이 경제학을 논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내가 경제학에 문외한인 까닭으로 설혹 무리한 주장이라 해도 이해하여 주시길 바란다. 지금부터 논하고자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경제학과 무관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걸핏하면 논해지는 그런 손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서청원대표가 광화문의 촛불집회를 ‘보이지 않는 손’에 빗대어 말한 것은 아마도 음모가 있고 그 음험한 기도에 의하여 반미시위(위에서 나는 반미시위가 아니라고 말했다)가 확산되고 조종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 때의 ‘보이지 않는 손’의 의미는 정확히 실패한 인간들의 변명과 피해망상을 의미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의미와는 정반대로 균형을 상실한 인간의 추락점이다.

역사적으로 실패하였고 실패가 확실한 인간들의 실족한 원인을 동서고금을 통해 들여다보면 하나의 뚜렷한 특징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독선적 가치관과 이를 우격다짐으로 실현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손’의 피해망상이다. 이 경우의 예를 힘들여 찾지 않아도 12.10일자 대한매일의 대한포럼(대선과 인터넷 반달리즘, 구본영 정치팀 차장)의 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의 상대방에 대한 사이버 폭력을 경고한 글이지만 그 글에서 원용되고 있는 반달리즘(Vandalism;사상과 문화의 다양성을 한치도 인정하지 못하는 문화, 예술의 파괴)의 한 형태가 서대표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는 우리들의 다양성에 기반한 세계시민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반성의 촉구를 이해하지 못하고 극렬 반미로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위 글에서 예로 들고 있는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음모론이라는 코드만으로 이해되는 촛불시위에 대한 서대표의 고체화된 인식은 그대로 세상의 가치관에 대한 파괴행위다. 멀리 생각할 것도 없이 국민경선이 불리해지면서 이인제가 들고 나온 것이 또한 그 ‘보이지 않는 손’, 즉 음모론이다. 선거 때가 되면 필요에 따라 요리조리 가공되어 유포되는 ‘김심’이니 ‘낙점’이니 하는 이런 음모론은 모두가 실패한 인간들이 내뱉은 저질의 개그였다. 스스로 후계자임을 자처하다가도 불리해지면 남의 탓에 음모까지 들먹인다. 자신에 대한 반성과 실패에 대한 겸허한 반성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약효 다한 그 음모론이 지금까지도 세상을 횡행하는 데에는 내가 늘상 강조하듯이 수구혈통들의 냉전이데올로기와 그것을 유포함으로서 누려왔던 기득권의 향유에 대한 오랜 믿음 때문이다. 반미로 몰고 그것을 선동하는 것은 곧 이북의 정권에 이 땅을 갖다 바치는 이적행위임으로 이는 보이지 않는 용공친북세력의 귀신놀음이라는 것이다. 그 음모론의 효용은 사실 우리의 기형적인 지배구조를 지금까지 고착화 시킨 일등공신이다. 그 음모론을 유포하며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하였던 수구의 아성이 무너질 조짐을 보이자 다급하게 뱉고만 것이 서청원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더욱 불쌍한 것은 그 약발이 전혀 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부작용을 체험한 국민들이 냉랭히 돌아서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후보는 부정한 그 ‘손’과 악수하기 위해 집회 주변을 기웃거리는 헤프닝을 연출하였던 것이고 손발 안맞는 한나라당은 미디어 담당자를 선거를 코앞에 두고 바꾸어야할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이후보 입장에서는 자신의 주변이 참으로 한심할 것이고 노풍 아니었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당정분리의 여파가 두고두고 한이 될 것이다.

열망의 손사위-국민들의 개혁과 변화에 대한 손짓

음모로서의 부정한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촛불시위현장이고 대선현장의 물밑을 흐르는 민심의 동향은 사실 정확히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고 있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는 곧 국민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이다. 지난 봄의 국민참여경선이 최고의 주말드라마로 국민의 이목을 붙잡아맨 것이 곧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었다면 지금 대선의 현장에서 밑바닥을 요동치는 민심의 파고는 그 열망이 실제로 실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확신, 나아가서는 이번 만큼은 낡은 정치의 유산과 구태의 수구책동을 끝장내고 <사진>12.19, 수구의 귀신놀음을 끝장내야 한다. 새로운 비젼과 전망을 현실화할 수 있다는 드높은 기대다.

이 열망으로서의 ‘보이지 않는 손’은 호남에서 충청으로 수도권으로 끝내는 수구들의 마지막 보루 영남의 지역정서마저 일거에 함몰시키며 세찬 용틀임을 하고 있다. 넌덜머리나는 그 지역갈등의 암초를 민심의 성난 파도가 휘감아 때린다. 부산에서 마산에서 대구에서까지 지역과 수구의 획책은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성이 된다. 어디 지역 뿐인가? 세대를 갈라 놓았던 그 불온한 이념의 골을 순식간에 메워버린다. 정권안보의 미명하에 조작 되었던 이념이 아버지와 아들이 머리를 맞대고 주고 받는 평등에 기초한 인간다움의 정신이 된다. 이것이 지금 대선의 현장인 이 땅에서 느껴지는 ‘보이지 않는 손’의 손사위며 국민을 부르는 손짓이다.

엊그제 조선의 시론에 한 얼빠진 선생께서 세대를 가르는 선거는 안된다고 점잖게 충고한 기사를 읽었다. 누가 세대를 가르자고 했던가? 젊은 세대의 정치로 낡은 정치의 유물을 혁신하자는 주장은 물리적인 나이로 세대를 가르자는 주장이 아니다. 늙었으니 안된다는 주장은 더욱 아니다. 새로운 세대에 의한 새로운 정치의 비젼을 이야기 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들 세대간의 단절과 분절을 교묘하게 선동하고 획책한 조작된 이념의 망령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월드컵의 빨갱이(붉은 악마)들이 세대를 갈랐나? 그들이 모인 붉은 광장에서 갈등하는 세대의 분절이 있었던가? 그 곳에는 모두가 하나된 ‘대~한민국’이 있었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지금 이 순간에도 지역과 세대와 이념의 골을 메우며 때로는 캠프 케이시 정문의 성난 분노로 때로는 광화문의 촛불의 행진으로 때로는 인터넷상의 치열한 논쟁으로 우리를 갈라 놓았던 모든 것들을 하나로 하나됨으로 묶어주고 붙여주고 있다. 12월 19일, 누군가는 대통령이 될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그는 바로 우리들의 열망의 손짓에 가장 가까운데서 함께 손을 흔든 자임을 말이다.

두 개의 ‘보이지 않는 손’중에서 서청원의 그 ‘손’으로는 결코 선거에서도 미래를 향한 그들의 역사적 책임으로서도 결코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올바른 열망의 손사위를 볼 수 있는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실패를 자신의 안에서부터 찾지 못하는 자, 자신의 이름 앞에 실패자 혹은 낙오자라는 오명을 전치(前置)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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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물며, 이곳 평창의 민주당은 잠을 자고 있네요. 시골 장날은 사람들이 모인 날인데, 민주당의 이곳 책임자는 보이지 않는 손에 가리어 있나 바요.
섶다리(2002-12-12)
2 하물며, 이곳 평창의 민주당은 잠을 자고 있네요. 시골 장날은 사람들이 모인 날인데, 민주당의 이곳 책임자는 보이지 않는 손에 가리어 있나 바요.
섶다리(2002-12-12)
1 참으로 속시원한 내용이 고맙습니다.
구시대 정치인들의 눈과 머리는 이 시대의 바뀌고 있음이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고 있고, 그럴수 밖에 없습니다.
그 것이 청산대상인 그들의 한계 아닙니까?
한돌(2002-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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