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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의 함께 이 길을의 칼럼방
너무 문학적인 표현, 햇볕정책
1.
인터넷 공간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씩 아주 좋은 내용의 글을 만나는 행운이 있던데, 며칠 전에는 아래와 같은 글을 보았습니다. "김광수 교수"라는 분의 논리학 책에 실려있는 내용이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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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의 논증을 분석 평가하는 것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시된 논증의 약점을 노출시켜 논증을 제시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 아니다. 분석의 정신은 이러한 자세와는 완전히 다르다. 논증 분석의 정신은 자비의 원칙을 준수하는 것이다. “자비의 원칙”이란 어떤 사람의 논증을 분석 평가하는 전 과정을 통하여. 마치 논증을 제시한 본인이 자신의 논증을 평가하는 경우와 같이, 논증을 제시한 사람의 입장에 서서 제시된 논증이 가능한 한 최선의 논증이 되도록 그 논증을 해석하고 재구성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논증을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 굳이 자비의 원칙을 따라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논증은, 해면 위에 드러난 빙산의 작은 부분처럼, 한사람의 신념의 체계와 지향적태도들의 총체 중 표면에 드러난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부분으로서의 논증을 ‘논증의 모든 것’으로 여길 경우 진단이 잘못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논증을 분석 평가한다는 것은 단순한 언어의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다. 세계관과 세계관의 접촉이다. 드러난 부분을 실마리로 하여 드러나지 않는 부분 속으로 ‘이해의 닻’을 내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의 마음이 공유하고 있는 부분을 확인하기도 하고,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부분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신념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렇게 되면, 대립된 신념 중 어느 편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판명될 수도 있다. 또는 어떤 오해가 있었다는 것도 발견될 수도 있고, 적어도 "문제‘가 무엇인지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논증의 표면만 보아서는 결코 얻어질 수 없다. 자비의 원칙을 적용하여, 논증 뒤에 숨겨져 있는 인격을 만나보지 않고서는 얻어 질 수 없는 성과인 것이다.

자비의 원칙에 따라 논증을 분석 평가하기 위해서는. 달리 생각하게 할 만한 이유가 없는 한, 논증을 제시한 사람이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진실성의 원칙을 준수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즉, ‘하드웨어’는 정상이며, 그가 하는 주장은 그의 ‘소프트웨어’에 담긴것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또한 그가 어떤 주장을 할 경우에는, 어떤 종류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 주장에 대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것, 즉 그가‘증명의 부담’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이와 같은 전제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나 지당한 것들이다. 따라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구태여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신경을 써야 할 전제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논증을 제시할 때나 말할 때, ‘표현의 경제성 원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즉, 자명한 전제는 굳이 언급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으며, 자명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완전히 정당화되는 주장으로 여겨지는 것은 생략하는 게 보통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가 생략했음직한 주장을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 모두는 실수를 범한다. 말이 헛나갈 수도 있고, 제시된 표현이 의도한 바가 아닐 수 있다. 따라서 상대의 작은 실수를 물고 늘어지는 비신사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참뜻’을 인정해 주는 아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분석의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논증 전체가 두서가 없을 수도 있고, 논증을 구성하고 있는 진술들도 그 표현이 명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직관에 호소하며, 중요한 전제를 빠뜨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논증들 모두를 엉터리라고 무시해 버리는 것은, 자비의 원칙에 따라 적절한 분석을 가하면 건전함이 드러날 수 있는 좋은 논증을 불공평하게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건강한 사람을 허수아비로 여기는 오류에 해당한다. 상대의 논증을 허수아비로 여긴다 해서 그 논증이 허수아비가 되는 것은 아니요, 허수아비로 여겨 손쉽게 넘어뜨렸다 해서 자랑스러울 것도 못된다.

더구나 그러한 오류를 범한 결과는 본인에게는 손실이 된다. 논증이 엉터리라고 대뜸 파기하게 되면, ‘목욕물을 버리면서 어린애까지 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릴 것만 버려야지 논증의 핵심까지 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비의 원칙에 따라 논증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분석의 정신은 단순한 ‘분석’의 정신만은 아니다. 그것은 ‘종합’의 정신이기도 하다. 분석의 정신은 주어진 것만을 분석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지 않은 정보까지 종합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논증의 재구성에 관한 한 분석과 종합은 맞물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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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경이니, 봉사니 하는 단어들이 있지요. 이런 단어들이 다 벼슬의 이름이라더군요. 조선 때 시각장애인에게 주던 벼슬의 이름이었는데, 차차 일반적인 시각장애인에 대한 호칭으로 바뀌었다는거죠. 즉, 처음에는 높임말로 사용되었던 것이, 나중에는 일반 용어로 되었죠. 그러다가 그 단어에 대한 느낌이 나빠지면서 약한 정도의 비속어 취급을 받게되고, 결국은 "시각장애인"이라는 아주 무미건조한 단어, 객관적인 상황만을 나타나는 단어에게 일상용어의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지금은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객관적인 단어, 혹은 "사회가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할 사람"이라는 뜻의 긍정적인 뜻을 포함하는 단어로 사용되므로, "시각장애인"이라는 단어는 객관적이거나, 호의적인 단어로 사용되지만, "장애"라는 단어의 느낌이 아주 나빠지게 되면, 언젠가는 이 단어 역시 또 새로운 단어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되겠죠. 용어란 늘 그렇게 바뀌어가기 마련입니다.

3.
사람 사이의 대화에서 문학적인 단어를 사용한다던가,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됩니다. 딱딱한 단어로는 수십 마디로 전해야할 내용을 문학적인 단어 하나로, 또는 적절한 비유 하나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제적이면서도, 내용이 풍부한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서로 상대에게 위에서 언급된 "자비의 원칙"이 지켜져야 합니다. 만일 서로가 서로를 헐뜯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상대에게 공격의 여지를 줄뿐이고, 끊임없는 논쟁의 연속이 될 뿐입니다.

누군가 "소경"이라던가, "봉사"라는 단어를 강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즉, 두 단어가 들어간 부정적인 의미의 속담들을 들먹이며 문제 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시각장애인"이라는 개관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편이 원래의 논지에서 벗어난 소모적 논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햇볕정책"이라는 지극히 문학적인 표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최근의 논란을 보며, "논리학 책에 나오는 "자비의 원칙"은 책에나 나오는 말이지, 우리나라 정치인들 수준에는 버거운 이야기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4.
노무현 후보의 발언을 두 가지로 해석해 봅시다. 하나는 최대한 "자비의 원칙"을 지켜서, 또 하나는 최대한 악의적으로...

[두 집단간에 적대적 대립이 있을 때, 이를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이다. 그러나 대화는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여야 이루어질 수 있다. 현실적인 상황과, 당위적인 상황이 서로 배치될 때,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를 밀어붙인다면, 대화는 이뤄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북한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은 바로 이러한 북한 포용정책이며, 나는 이 정책이 올바르다고 생각하여, 이를 지지해 왔고, 계속 계승해 나갈 것이다.

이러한 대북 포용 정책을 언론에서는 "햇볕 정책"이라고 표현해 왔다. 이러한 용어는 실제의 대북 정책과 상당히 잘 맞는 용어이며, 일반 국민들에게 대북정책의 기조를 쉽게 잘 설명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용어 자체가 문학적인 비유를 사용한 단어이므로, 혼란의 여지가 있다. 즉, 햇볕이라는 것이 자연이 아무런 대가 없이, 인간에게 주는 것이듯, 대북 포용 정책을 일방적인 퍼주기 정책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또, 이러한 인식 때문에, 정당한 대북 항의나, 북한 당국 태도의 문제로 인한 남북대화의 경색이 "햇볕 정책의 실패" 또는 "햇볕 정책의 포기" 등으로 과장 보도되는 경향이 있으며, 언론의 그런 보도에, "햇볕정책이 현 정부의 최대 치적"이라는 표현에 얽매어 있는 현 정부가 지나치게 민감해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햇볕정책"이라는 애매한 용어를 "대북 포용 정책"이라는 객관적이고 오해의 소지가 없는 단어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되면 "햇볕정책"이라는 단어에 얽매어 빚어진 사소한 정책적 혼선들도 바로 잡힐 것이라 본다]

몇 가지 "자비의 원칙"을 적용한 해석입니다. 노후보가 김대중 정권의 부채와 자산을 다 가지고 가겠다는 발언을 여러 번 했기에, 정책의 기조 자체에 대한 반대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변호사 출신이므로 정확하고 객관적인 용어의 사용을 선호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서 노후보의 발언에서 생략되었으리라고 예상되는 내용들을 최대한 복원해서 재구성해 본 것입니다.

다음은 악의적 해석입니다.

[김대중 정권의 여러 실수가 민주당 인기 하락의 원인이 되었고, 햇볕 정책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이 많다. 나는 현실 정치인으로서 내가 옳다라고 생각하던 아니던, 국민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다면, 이에 따라갈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햇볕 정책"은 바뀌어야 하며, 어차피 내용이 바뀔 것이라면, 노무현에 김대중의 이미지가 겹쳐서 생기는 손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김대중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햇볕정책"이라는 용어부터 바꾸어야 한다]

자. 두 가지 해석 중에 어느 쪽이 평소의 노무현 후보의 언행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늘 조선일보만 보아왔던 사람들, 지역적인 대립 문제를 모든 해석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대 부분 후자를 지지하는군요. 그러나 오랫동안 노후보에 관심을 두었던 사람들, 즉, 예전부터 노후보를 관찰해 왔던 사람들, 그래서 수구 언론이 왜곡한 모습과 노후보의 실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전자를 지지합니다. 물론 그런 분들 중에도 후자를 지지하시는 분도 꽤 계시지만...

노후보는 김대중 대통령을 밟고 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홍비리가 가장 극성을 부리던 지방선거 기간 중에도 "김대중 정권의 자산 부채 동시 승계론"을 버리지 않았던 노후보가 이제 와서 김대중을 밟고 가기 위해 "햇볕정책"이라는 용어를 버린다고 보십니까?

무조건 악의적으로 보려하는 분들께는, 더 뭐라 할 말이 없군요. 제 눈에 콩깍지라고나 할까... 에구 저도 문학적인 비유를 쓰고 말았네요. 제 글을 "자비의 원칙"을 지키지 않고 읽으실 분들께 공격의 여지를 주고 말았군요.

글쓰기 참 힘든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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