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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흥재의 세상구경의 그 여행의 기록
[노,창 연구]제왕의 정치학, 서민의 사회학
[노.창 연구]제왕의 정치학 서민의 사회학

절대 왕정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짐이 곧 국가’라던 루이14세의 절대권력도 시민의 저항으로 무너진 것이 3세기 전의 일이다. 이씨의 조선이 외세에 의해 패망함으로 이 땅에서도 제왕의 정치는 종식 되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21세기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대에도 ‘제왕’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제왕다운 면모를 잃지 않고 있다. 제왕에 대한 향수요 그리움인지 제왕답지 못한 자들의 제왕흉내를 너무 많이 보아야 했던 우리의 슬픈 현대사 탓인지는 모르겠다.

제왕적 대통령제, 제왕적 총재, 제왕적 후보 등 제왕과 결합하여 언론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일단 부정적이다.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제의 폐해를 말함이고 이회창후보의 독단적인 일면을 한마디로 대변하는 말이다. 노무현에게는 아무도 제왕적 후보니 하는 딱지를 붙이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나는 실소를 금치 못한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는 노무현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제왕적 리더십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제왕 혹은 영웅은 필요한 법이다. 다만 시대와 역사에 따라 그 제왕의 풍모와 요구되는 리더십이 다를 뿐이지 제왕이 없는 시대는 곧 불행한 시대다. 오늘날 부정적으로 비쳐지는 제왕의 의미는 제왕답지 못한 이들이 억지로 저질러 놓은 ‘제왕흉내내기’의 부정적 결과다.

진정한 제왕이란 곧 절대군주가 아니라 어떤 외압과 부정에도 굴하지 않는 당당함이며 의연함이다. 올바른 가치나 국민의 열망에 반하는 권력이라면, 비록 자신의 권력일망정 당당하게 걷어찰 수 있는 신념과 가치지향이 이 시대의 제왕적 리더십이다. 그런 제왕의 풍모를 갖추지 못하거나 잃어버릴 때, 그들은 제왕을 흉내내다 제 칼에 숨지고마는 패거리 일당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는다.

루이14세가 절대권력을 누리기 전, 전국을 유랑하며 갖은 고초를 겪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또한 그의 절대왕정에서 소위 콜베르티즘(Colbertisme)으로 지칭되는 중상주의와 식민지 개발로 인하여 프랑스의 국운이 융성했던 사실이나 코르네유, 라신, 몰리에르 등의 거장이 출현하여 문화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것을 기억하는 데는 인색하다. 오늘날 프랑스어의 우아함과 세련미가 이 시절에 다듬어 진 것을 아는 이도 많지 않다.

물론 나는 그 시절의 향수를 가지고 있는 복고주의자는 절대 아니다. 루이가 올바른 제왕의 풍모를 잃어버리고 타락할 때, 어떻게 몰락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반면교사로 삼으려 함이다. 가깝게는 박정희나 전, 노의 제왕흉내내기에서 경제적 도약과는 상관없이 어떤 시민적 저항과 몰락을 자초하는가를 우리는 이미 보았다.

올바른 제왕의 리더십은 시대와 역사적 배경에 따라 변천하여 왔다. 마키야벨리의 군주론에서부터 조광조의 도학정치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치세의 철학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제왕적 리더십이 제대로 기능할 때, 그 시대는 문화가 융성하고 국운이 상승하며 세상의 인심이 평화롭다는 것이다.

세종시대는 가장 강력한 절대왕권의 시대였다. 아버지 태종(이방원)의 피의 숙청으로 견고해진 왕권의 바탕위에서 우리말과 글이 태어나고 과학이 발달하였으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우리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왕권이 쇠퇴하면서 소위 당파정치 세도정치의 부정과 부패 속에서 조선은 서서히 몰락하였고 끝내는 일본의 식민이 되는 국치(國恥)를 당하며 멸망하였다. 더욱 불행한 것은 해방이 되고 난 후의 일이다. 새롭게 건국된 이 나라는 얼굴만 바꾼 친일파들의 나라였고 이승만으로부터 이어진 집권자들의 면면에서는 단 한 명도 올바른 제왕의 풍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의 인식을 멀리 넓힐 것도 없이 양김 10년의 치세를 보자. 김영삼의 불행은 오로지 대통령을 향한 야욕에서 비롯된다. 3당 합당은 겨우 일기 시작한 민주시민사회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기대를 무참히 짓밟은 폭거였다. 오로지 집권을 향한 수구기득권 세력과의 동거는 역사의 시계바늘을 뒤로 돌려놓고 말았다.

그러니 그는 자신을 권좌로 올려놓은 수구진골들의 꼭두각시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다. 최초의 문민정권이라는 간판 속에는 총대신 펜을 들고 죽죽 줄그으며 음흉하게 웃고 있는 수구들의 얼굴이 있었다. 김영삼의 양 손목에 쇠줄을 걸고 위에서 장난치는 인형극이 문민정권이었다.

문민의 인형극이 막내리자 이번에는 국민정권이라는 레이저쇼가 펼쳐졌다. 현란한 빛과 조명으로 만들어지는 이미지들은 전원을 내리면 순간 사라지는 가상의 이미지였다.

수평적 정권교체, 햇볕정책, 외환위기의 극복 같은 레이저쇼가 펼쳐진 허공 아래의 어둠 속에서는 각종 게이트에 홍자 돌림의 부정, 이정연의 병역비리 등이 스멀스멀 기어다니며 이 땅의 역사를 국민의 기대를 갉아먹고 좀이 슬게 하였다.

명(命)과 령(令)이 따로 노는 붕당의 카리스마, 이것이 YS와 DJ의 한계였다. 그렇기에 그들의 집권은 수구의 몸을 빌어 태어난 대리모 출산에 지나지 않았다. 정조를 잃어버린 그들의 가신들은 아무 곳에나 몸을 맡기며 정치적 욕망을 탐닉하는 데에만 몰두하였다.

태생적 결함을 가진 리더십은 그들을 단속할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이 줄어드는 대통령이라는 권력의 속성은 이제 철새들에게 더없이 편안한 서식지가 된지 오래다.

양김 10년이라는 오욕과 절망의 역사가 그 퇴장을 앞둔 시점에서 제왕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있다. 민주당의 노무현, 한나라당의 이회창, 정당도 아닌 축구협회의 정몽준 등이다.

종류미상의 철새들 이인제, 김중권, 이한동, 박근혜가 주변에서 날개 퍼득이고 그 옆에는 늙어 강남으로 가지 못하는 낙오된 텃새형 철새 김종필도 보인다.

철새들 옆에서는 이리와라 저리가라 꼬득이는 모사 청둥오리들의 입질이 한창이다. 먹이도 물지 못하고 헛품파는 모사들의 물미역질에 흙탕물만 일렁이고 우리네 서민들은 소음에 시달린다.

이 쯤 되니 진정한 제왕에 대한 나의 이야기도 매양 지겨운 말장난에 불과하다. 그저 지겨워 눈 돌리고 귀 막는 것이 그나마 화병 안나고 제 명에 사는 길이다. 불과 4달 전에 품었던 우리의 희망은 수초 밑으로 가라앉은 지 오래다.

그러나 지겹고 짜증나도 나는 말해야겠다. 제왕의 정치에 대하여, 그것이 제 속에 품고 잃지 말아야 할 서민의 사회학에 대하여 나는 말해야겠다. 적어도 포기하고 도망다니는 것보다 남아 싸워보는 것이 내게는 더욱 행복함이고 부끄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논할 가치도 없는 철새들에 대하여는 신경 쓰는 것도 귀찮다.

언제고 그 철새들을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을 때에 이르면, 우리들은 징치고 꽹과리 두드리며 철새몰이에 나설 것이다. 한 방이면 족하다. 우리 국민들의 진정이 담긴 총성 한 방이면 철새들은 혼비백산 달아난다. 원래가 용기라고는 가슴팍 솜털 만큼도 없는 조류들은 새총에도 놀라고 다신 그 가지에 돌아오지 않는다.

사냥이라는우리의 즐거운 유희를 위해 철새들의 서식지를 조금 더 지켜보자. 안심한 철새는 우리들의 신나는 사냥을 차마 예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새대가리인 것이다.

-제왕의 정치학과 서민의 사회학

위에서 나는 제왕을 말하였다. 아니 제왕적 리더십을 말했다. 오늘날의 제왕 혹은 제왕적 리더십은 절대왕정의 리더십일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위에서 절대왕권의 경우를 예로 든 것은 어떤 절대권력이라도 그것을 행사하는 권력자의 자질에 의하여, 또한 훌륭한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제왕이 있음으로 해서 그 시대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황금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제왕은 독재나 절대권력을 의미하는 제왕이 아니다. 21세기의 제왕이란 그 시대의 다양한 가치들과 필연적인 가치들의 충돌, 대립과 반목에 까지 이른 계층과 계급간의 이해를 원칙과 소신으로 조정해낼 수 있는 제왕의 풍모를 이른다. 이회창에게 대입되는 제왕은 아무래도 전자의 제왕이다. 내가 노무현에게서 기대하는 제왕의 풍모는 후자의 경우다.

이회창의 제왕은 정치적 제왕이며 노무현의 제왕은 사회적 제왕이다. 이렇게 정의하는 것이 무리가 따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 글이 어떤 학설의 논증을 위하여 쓰여지는 것이 아니므로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자.

하버드대학 케네디 행정대학원의 교수이자 리더십 연구소장인 데이비드 거겐(David Gergen)은 저서 ‘권력의 목격자(Eyewitness to Power)’에서 성공한 대통령의 조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정의한 그는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관리를 통해 인격적으로 성숙해야 된다고 말한다. 대통령의 능력을 재는 척도는 지능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과 판단력, 성격과 신념 그리고 용기의 총합이며 이 능력은 책임있는 지도력을 행사하고 현명한 정책결정을 내리는 핵심적 자질이라 말하고 있다. 나만의 판단일 지는 모르나 나는 이회창에게서 어떤 신념과 용기도 발견할 수 없다.

아들 둘 모두를 군대에 보내지 않고 초등학생의 판단력으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병적기록부를 이상이 없는 것이라 말하며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자신에 적대적이라 하여, 국민의 한사람인 김대업에게 전과자 사기꾼 등의 극언을 서슴치 않는 그에게서 나는 어떤 지도자의 자질도 발견할 수 없다.

아직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서 자신의 아들이 병역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김대업의 주장도 똑같이 존중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회창은 공개적으로 그를 천하의 협잡꾼으로 몰아 부친다. 그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지도자의 자질이 아니라 추악한 소인배의 일그러진 눈빛이다.

97년 민자당인지 신한국당인지 대선후보로 선출되고 나서의 일을 상기하면 저런 정상배들이 제일당이 된 이 나라의 현실이 절망스럽기만 하다. 서청원대표를 위시하여 어느새 한나라당의 주류로 변신한 정상배들의 한결같은 성토는 병역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회창이었다.

또한 이회창은 자신을 등용하여 대선후보의 자리에 이르도록 한 정치적 은인 YS를 짓이기고 침 뱉는 것이 그가 행한 정치라는 행위의 전부였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자신의 족보를 부정하는 패륜아에게 어떻게 우리의 삶을 맡긴단 말인가?

성공한 대통령의 두 번째 조건은 국가를 어떻게 이끌고 나갈 것인지 목표가 선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회창은 우선 모르는게 너무 많다. 그가 아는 경제란 것은 참모들이 적어준 메모를 읽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내 말은 사실이다. 준비없이 나와서 내가 질문한 10가지 문제에만 정확한 답을 한다면 나는 이 말을 취소할 것이다. 또한 그 책임도 지겠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 정책이니 목표라는 것이 시시때때로 변한다는 것이다.

서해교전이 일어나고 국민의 감정이 대북한 성토로 돌아서자 담박에 주적론이 나오고 대북지원중단, 금강산관광불가 등 공세적으로 돌아선다. 그런 그가 어제는(아리랑 축전, 아시안게임 북한참가 등으로 남북화해의 기미가 보이자) '21C 희망포럼'에서는 긴장완화와 교류협력의 병행추진이라는 기회주의적 변신을 몰염치하게 감행한다. 그 뿐인가?

그는 대선후보로 나서면서 ‘기업집단제’의 궁극적 폐지와 상호출자제한 폐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97년 대선에서 “재벌의 과도한 경제적 집중은 공정거래 감시와 상호출자규제를 통해 막아야 한다(97.12.1 대선합동토론)”고 주장하였다.

그의 말바꾸기, 소신없는 정책표명은 밤새 자판을 두드려도 다 적시할 수 없다. 대통령의 아젠다는 국가가 딛고 있는 핵심가치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오직 정치적으로 제왕이 되어야 한다는 수구들의 반동과 친일기득권 세력의 왜곡된 열망이 만들어 낸 권력중독자일 뿐이다.

그 정치라는 것마저도 자신의 성정으로 망치기 십상인 불완전한 견습생이다. 창자를 훑어버리겠다는 그의 성정은 그대로 정책결정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성격은 운명이란 거겐의 일갈이 새삼 폐부를 찌른다.

이회창 같이 정치적 제왕의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들은 권력 그 자체가 정치의 궁극이다. 권력이 주는 그 거대한 힘에 주목한다. 시대를 떠나 주류 혹은 메인스트림의 의미는 권력의 주변에서 기생하며 자자손손 그 힘을 행사하고 누리려는 집단이다.

그들에게 권력의 상실이란 그들이 지배하고 통제하며 길들인 가축같은 존재인, 타락한(권력으로부터 뚝 떨어져 있는) 민중의 시궁창으로 빠지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황색조끼 입고 미화원 노릇하는 동안만 잠깐 서민에 대하여 아는 체를 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이는 다만 절차일 뿐이지 결코 삶이 되지 못한다.

이회창이 자신의 친구인 서울대 병원의 의사를 찾아가서 아들이 군생활을 잘 할 수 있겠나 상담하였다고 궁색한 변명을 한다. 우리들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아들이 군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못할까? 하는 걱정을 국가의 처분에 맡기고 또 당연히 국방의 의무를 다했음 하며 바란다.

이회창처럼 국가를 대신하여 아들의 군복무적합성을 자신이 나서서 사적으로 판단하려 들지 않는다.

이들이 수구기득권이다. 그들의 사고는 국가의 위에 있다. 언제나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국가와 그 주인인 국민보다 우선하는 것이 그들의 변할 수 없는 습성이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어떠한 파렴치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이 주는 식은밥에 꼬리를 살랑거리는 배알 없는 백성에게 ‘우리는 길들여져 있다’고 외치고 알려줘야 할 책임이 바로 지식인 또는 깨어있는 우리들의 막중한 할 일이다.

노무현이 추구하는 제왕의 역할이란 권력의 힘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는 권력이 행할 수 있는 여러 기능들에 대하여 주목한다. 정치적 권력으로서의 제왕이 아니라 사회적 권력으로서의 제왕의 역할이 그가 맡고 싶은 자리다.

부정과 부패의 근절, 지역갈등의 해소와 남북의 통일 같은 개혁적인 가치들과 그 가치들이 올바로 작동하도록 조정하는 시스템으로서의 제왕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제왕이 되겠다고 대선후보의 자리에 올랐건만 정치적으로는 늘 미성숙한 듯이 보인다.

정치가 세와 줄 그리고 돈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저등의 시스템이라면 그 시스템의 투입물을 하나도 가지지 못한 노무현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어긋나고 빗나가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다.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노무현이 서투른 것이 아니라 노무현리더십이 낡아 빠진 기존의 시스템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삐걱댈 수밖에 없고 구태의 정상배들이 자기들과 안 맞는다고 연일 불만인 것이다.

딱 한 번, 노무현은 YS를 찾아가며 그 시스템에 맞추려는 시도를 하였다. 나는 그래서 한 때, 그가 참 미웠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 곁으로 나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 참아내고 있다.

그를 생각하면 일본 막부시대의 진정한 패자인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떠올린다. 난세를 피하기 위해 원숭이 같은 토요토미에게 권좌를 잠시 빌려준 그의 인내의 치세를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일본의 개화와 유신(박정희의 유신이 아니고)은 에도막부에서 시작 되었다.

아무튼 노무현의 리더십은 사회적인 리더십이다. 그는 실패할 지언정 언제나 우리가 사는 낮은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권력이 아니라 권력으로 이룰 수 있는 많은 소중한 가치들이다.

그래서 그가 지향하는 권좌는 정치적 권력의 수장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점들을 시급히 개선하고 기풍을 진작 시킬 수 있는 권력의 역할이다. 너무 공치사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적어도 그는 누구처럼 서민처럼 행동하며 생각하는 척 할 필요가 없다.

그는 이미 서민이며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강자와는 거리가 멀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사물은 작고 보잘 것이 없으며 그 윤곽을 파악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이미 말했듯이 늘 높은 곳에 있다가 어쩌다 한 번 필요에 의해 내려와 살피고 가는(아는 척 위장하는) 수구진골의 관심은 바로 잊혀지고 만다.

S대 출신들이 많은 경쟁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수구꼴통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시종이 되거나 올바른 가치를 외치다 정계에 입문하면서부터 변질되고 마는 것은 바로 망각의 산물이며 정치적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 때문이다.

노무현에게는 최소한 이런 망각현상에 대한 경계가 필요 없다. 때문에 덤벙대거나 소침한 듯이 보일 때도 내가 불안하지 않은 까닭은 그가 우리네 세상에서 발을 빼고 정치적 권력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는 순간, 그는 아무런 실체도 없이 증발하고 말거란 사실이다.

그는 서민정치인이며 그가 추구하는 가치와 경쟁력은 서민들의 열망을 대변하는 것 뿐이다. 이를 부정하고 절대권력으로서의 제왕이 되려는 순간, 그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이는 노무현도 알고 우리도 알고 나도 아는 것이다.

나는 노무현이 이 시대의 제왕이 되었음 바라고 또 바란다. 영웅이 없어 불안하고 사는 것이 지지리 궁상인 시대에, 우리는 얼마 전 영웅들을 보았다.

태극전사가 우리들의 영웅이었고 그 영웅들의 한 가운데에는 히딩크라는 낯선 나라의 제왕이 보였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그 영웅들과 제왕들의 뒤편에는 그들보다 더욱 늠름하고 용기있는 제왕의 후예들이 있었다. 바로 ‘붉은 악마’라는 <<가능성의 제왕>>이 나를 우리를 사로잡았다.

노무현이 나는 그 감동의 제왕, 보잘것 없는 소시민에서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거듭나는 제왕들의 앞에서 제왕기를 휘날리며 우뚝 서는 그 날을 보고 싶다. 썩어 빠진 이 땅의 정치를, 수구들이 지배하는 위장된 세상을, 조작하는 언론이 유포하는 거짓된 소문을 일거에 쓸어 버릴 그 바람에 미쳐 춤추고 싶다.

매일 밤 꿈꾸는 그 ‘가능성의 리더십’에 더 이상 뒤척이지 않아도 되는, ‘현실의 리더십’이 되어 있는 세상에서 나의 아이들과 아주 작은 것들, 예를 들면 오늘 읽은 책은 무엇인지, 엄마에게는 왜 혼났는지 하는 이런 사소한 것들에만 신경쓰며 나는 살고 싶다. 정치고 사회고 그런 것은 다 잊고 말이다. 끝.


덧붙임)
철새들은 호수를 찾지만 그들이 호수의 주인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추워지고 자신들이 배고파 지면 또 떠날 것이다. 철새 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정상배들의 말로는 분명하다. 순간 그들의 떼거리 군무가 현란하고 그 폼새가 웅장한 듯이 보일지 모르나 철새는 머무르지 못한다. 쫓겨가는 운명이 철새다.

그 철새들과 ‘반부패 통합’ 어쩌고 하는 날지 못하는 오리(집에서 기른 청둥오리는 야성을 잃어버려 날지 못하며 철새들의 틈에 풀어 놓아도 철새가 떠나가는 광경을 혼자 남아 지켜볼 뿐이다)는 자신이 식용으로 밖에는 쓰일 수 없는 가축이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자신과 놀던 철새는 떠나가고, 그가 할 일이란 ‘엘 콘돌 파사’(철새는 날아가고 로 의역된)나 들으며 아버지의 실패와 자신의 좌절을 오래도록 슬퍼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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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방법론에 있어서 노무현씨가 탈당을 통한 제왕적인 참모습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만, 현실정치 라는 것이 그러지 못하니.
이강철(2002-08-24)
2 우리의 선택은 하나다!라는 개그가 있다.
우리의 선택은 하나다. 맞다. 하나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만으로는 안된다. 내 주위의 선택까지 끌고 와야 한다.
인터넷을 할 줄 몰르거나 인터넷을 자주 접하지 못해 지면을 보는 분들(대부분 나이분들- 주위의 어머니 아버지 삼촌까지)을 인터넷을 배워라 할 수는 없다.(배우면 좋겠지만.)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그들을 설득해 나가야 한다. 차분하게....
낡은 생각이라고 넘겨버리지(무시) 말고 인내를 가지고...
어린 놈이 뭘 알아 하면, 우리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웃으면서 감정상하지 않게 설득해 나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길 수 있다.
물론 이회창(회충이라고들 하지만)을 열열히 지지하는 고수분자들은 빼고...
내 주위에 지금의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인지 시켜주는 것부터 하자.
좀 정치적 발언 같지만 우리 모두 선거 운동원이라고 생각하고 주위의 사람들 표만 돌린다면 우리는
우리는 이길 수 있다.
후배부터 선배터 설득해 나가자.

살맛나는 새상을 위하여
국민후보 노무현 화이팅.
김현(2002-08-24)
1 속이 다 후련합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자주 부탁합니다.
유광일(2002-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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